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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스스로 반복하는 습관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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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은 스스로 반복하는 습관 갖고 있다”
  • 정윤석
  • 승인 2015.04.09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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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난 이단··· 지금은 어떤 모습?

기독교는 하늘에서 방금 뚝 떨어진 종교가 아니다. 역사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다. 그런데 곧잘 성령충만, 성령의 음성, 하나님의 영을 빙자해 기독교의 역사성, 신앙의 선배들이 물려 준 소중한 지적 유산들을 망각하는 움직임을 쉽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 야신으로 불리는 김성근 감독

프로야구의 계절이 돌아왔으니 야구와 빗대서 한마디 해보고자 한다. 만일 팬들로부터 ‘야신’(野神)으로 불리는 김성근 한화 감독이 야구 경기장에서 “내가 야구의 ‘영’을 받았다”고 말했다고 쳐보자. 그가 “야구의 영을 받았다”며 지금까지 지켜왔던 야구의 룰을 완전히 무시하기 시작했다. 야구공을 발로 차기 시작했다. 야구의 영이 시켰다는 것이 이유였다. 골대를 만들어 놓고 야구 공을 발로 차서 넣으면 ‘홈런’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말했다. 이걸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야구의 영’을 훼방했으니 저주를 받는다고 난리를 쳤다. 그랬다고 해보자는 거다. 프로야구를 아는 수많은 사람들, 야신을 향해 도대체 어떤 평가를 했을까?

그런데 기독교라는 세계로 들어오면 얘기가 달라진다. 누군가,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전제만 깔면 많은 사람들이 한수 접고 들어간다. 어떤 사람이 “성령이 너에게 이것을 시켰다”며 명령을 내리기만 하면 아무리 비상식적이고 불합리한 일도 ‘하나님의 일’이라며 벌벌 떨며 복종하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먹었다면서 스스로 ‘보혜사’, ‘재림주’라고 하는 사람을 이 시대의 재림주로 따르기까지 한다. 그런 사람들을 따르다가 이사도 수시로 한다. 직장도 그만두고 가출도 한다. 이혼도 불사한다. 가족 알기를 우습게 안다. 수천만원에서 수십억 대 재산도 바친다. 비상식적인 일을 ‘성령’의 이름으로 아무렇지 않게 해내는 크리스천들이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그건 기독교의 ‘룰’을 몰라서 그렇다. 기독교의 룰에 대해 알면 누군가 갑자기 ‘하나님의 영’을 받았다며 이상한 주장을 할 때 우리는 마땅히 호루라기를 불며 그에게 당당하게, 주저없이 옐로카드를 내밀 수 있다. 기독교에도 룰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절대 깨뜨릴 수 없는 룰을 우리는 종종 기독교의 근본 교리라고도 부른다.

“그 교리들은 신앙이라는 애벌레를 보호하려고 그 둘레에 친 지적 ‘고치’ 같았다. 고치가 적절하게 만들어지면 그리스도인의 삶과 사상에 탄력과 안정을 더할 수 있었다. 반면에 결함이 있는 고치는 신앙의 삶을 훼손하고 왜곡할 여지가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이단은 신앙을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미숙하거나 왜곡하거나 훼손하는 작업이었다고 볼 수 있다. 속에 있는 애벌레를 보호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손상시키는 잘못된 고치였다는 말이다.”(알리스터 맥그라스 저, 홍병룡 역,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 포이에마, 2011년, 127p).

신앙의 선배들, 특히 그리스도의 부활 후 초대교회에서 교부시대에 이르기까지 신앙의 선배들은, 어떤 믿음의 표현이 용납될 수 있고, 어떤 표현은 용납될 수 없는지 분명히 정리하지 않으면 안됐다. 그 치열한 역사적 배경 가운데 탄생한 것이 기독교의 근본 교리다. 이 근본 교리들은 침례교,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순복음 등 어떤 교파를 초월해서 공유하는 것들이다. 알리스터 맥그라스의 표현대로 이 근본 교리는 기독교 신앙을 보호하는 ‘고치’라고 할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정경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무엇을 신앙의 지침으로 삼았을까? 다시 말하지만 정경이 형성되지 않았을 때다. 마음에 깨달아지는 하나님의 음성이나, 귀로 들리는 직통계시가 대세였을까? 의외로 1세기 후반~3세기 초반, 그리스도인들은 ‘문자의 사람들’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도들이 전한 ‘편지’들을 사랑한, ‘문자의 사람들’이었다. 정경이 완료된 현재, 하나님의 음성듣기가 유행하는 현실과는 매우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할 수 있다.

“2세기 시리아 출신의 그리스 작가 사모사타의 루시안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책을 쓰고 해석하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루시안에게 기독교는 삶과 믿음이 저술에 의해 형성된 일종의 문자 공동체로 보였다. 로마가 기독교를 비판할 때 그들의 저술에 초점을 맞추고, 기독교를 제거하려 할 때 책을 압수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위의 책 79p.).

기독교를 말살하기 위해 로마가 벌인 일은 기독교인 처형뿐만 아니라 초대교회판 ‘분서갱유’였다. 그만큼 초대교회의 신앙의 선배들은 사도들이 전했다는 텍스트를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며 회람했다. 그중 사도들이 전한 편지에서부터 이미 이단사상들에 대한 경계가 나타난다. 성경에 기록한 ‘다른 복음’의 정체들을 되짚어 보면 기독교의 근본 교리가 뭔지 짐작이 가능하다. 이번 기획에선 ‘초대교회사에서 나타난 이단’을 되새겨 본다.

▲ 할례받는 어린 아이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사상들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려는가?” 유대적 기독교 율법주의자들
갈라디아서에는 유대 기독교인들의 율법주의적 면모를 읽을 수 있다. 성경부터 읽어보자.

갈 3:1~5절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갈 4:5~11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바울이 갈라디아서 3장에서 말하는 ‘그들은’ 시작을 잘 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에다 관심을 쏟았다. 따라서 그들은 그들의 칭의를 위하여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율법의 준수를 더함으로써 보다 높은 수준의 완전으로 나아가려고 했다(매튜헨리 갈라디아서 주석).

“갈 4:10의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에서 - 바울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되고 외식적인 율법주의를 책망하고 있다. 본절과 유사한 문구는 골 2:16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당시 이방인 교회속에는 거짓된 외식적 율법에 의하여 상당한 문제가 발생한 것 같다. 갈라디아 교인들이 의식적으로 지켰던 율법의 규례들은 다음과 같다. (1) '날':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지켰던 금식일과 안식일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하루만 지키는 절기가 포함된다. (3) ‘달’과 '절기'. 레위 율법이 규정하는 3대 절기, 곧 유월절, 오순절, 장막절(레 23장)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전통에 의하여 추가된 나팔절(레 23:23 - 25), 수전절(마카비상 4:52 - 59), 부림절(에 9:24 - 32) 등을 말한다. (4) '해' 매 7년마다 돌아오는 안식년(레 25:2-7)과 매 50년마다 돌아오는 희년(레 25:8-55)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상에서 언급한 종교적 절기들을 충실히 지킨 사실만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을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바울은 그들이 율법의 참된 목적을 깨닫지 못하고 율법을 구원의 방편으로 삼는 왜곡된 신앙을 소유함으로 더 큰 멍에와 굴레에 빠져 헛된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책망한다(후크마 주석).

“바울은 갈라디아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려는 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만일 그들이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아무 유익이 없는 셈이다(5:2). 그들이 율법의 지시대로 할례를 받는다면, 그들은 이제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셈이다(5:3). 율법의 지시를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자들이며,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다(5:4). 이렇게 하여 그들은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버리고, 선동자들이 선전하는 거짓복음을 받아들인 것이다.”(김창락외, <신약성서개론>, 대한기독교서회, 2002년, 321페이지).

성경에서는 유대적 기독교인들의 율법주의가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 율법을 지키려는 사람의 의도가 무엇이든 그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라고 말씀한다.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한, 예수를 믿음만으로는 부족하고 ‘할례’나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한 유대적 기독교인들의 메시지가 지금도 신앙생활의 현장에서 종종 들려 온다. 다음과 같은 설교다. 이런 설교는 갈라디아서에서 ‘저주’한 다른 복음은 아닌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자, 보십시오.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왜 드리지 못하는 줄 아십니까? 없어서가 아니라 욕심 때문에 못 드리는 것입니다. ···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속에서 들어야 할 신령한 말씀을 그 십일조를 드림으로 들을 수 있는 권리가 생기는 것입니다. 만약에 당신이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 죄로 인한 영혼의 부도를 무엇으로 막을 수 있겠습니까? ··· 지금 우리 교인들 중에 십일조를 안 내는 교인들이 상당히 많다고 그럽니다. 십일조를 안 내는 사람이 들림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들 예수 왜 믿나 모르겠습니다.”(Y 목사의 1997년 발행서적).

십일조를 내야 한다는 부분에서 시비를 거는 게 아니다. 이 분의 설교에선 십일조가 마치 ‘영혼의 부도를 막을 수 있는’, ‘들림 받을 수 있는’ 조건처럼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지나치게 이런 부분이 강조되다 보면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한 ‘다른 복음’으로 변질될 우려가 있지는 않은가?

“날짜 하루 차이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너무 율법적이지 않습니까? 이것은 토요일이냐 일요일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계명에 순종하느냐 사람이 만든 계명에 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에 순종하느냐 사탄의 권위에 순종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날짜 하루 차이가 아니라 순종의 대상이 누구인가와 당신의 구원이 달린 문제입니다.”(안식일 준수와 관련한 주장).

짧게 십일조와 안식일과 관련한 설교만 인용해 봤다. 누구의 설교인지는 공개하지 않는다. 위와 같이 마치 십일조와 안식일 준수의 문제를 구원 문제와의 관계를 설정하게 되면 그것은 갈라디아서에서 지적한 다른 복음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커진다. 갈라디아서는 이런 부분에선 추상같다.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는 그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이다.

빌립보서 3장 1절~9절도 유대적 기독교 율법주의와 관련한 말씀이다.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바울은 의에 도달하는 이 새로운 길은 옛 길을 무효화시킨다고 주장한다. 옛 길은 유대 율법의 지시들을 따르는 것이었다. 이 길은 유효하지 않다. 그것은 율법이 규정하고 있는 것에 따라서 사람들이 수행하는 의(내 자신의 의)를 얻고자 하는 시도인데, 이제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의 선물로 오는 의,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일을 받아들이는 믿음을 통해서 얻는 의로 대체되었다. ··· 그리스도와 율법은 구원의 길들로서는 서로 양립할 수 없다.”(하워드 마샬/ 박문재·정용신 역, <신약성서신학>, 2006, 428페이지~429페이지).
믿음과 율법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 특히 구원의 길들로서는! 그렇다면 이런 메시지는 어떻게 들리는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더 나은 의를 갖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 뭐가 필요해요? 너희 의가 필요하다고 그랬어요. 잘 들으세요.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러분 예수 십자가를 통해서 믿을 때 받는 그 의가 아니예요.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의입니다. 너희 의가 서기관, 바리새인보다 낫지 못하면 너희가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B 목사, 2004년 설교).

이 설교를 한 목회자는 실제로 장로교 합동측에서 신율법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참석 금지 규정’을 받았다. 그러나 이런 교회에 현재 1만명 이상의 신도들이 모이고 있다.

▲ 영지주의자들의 '충만'과 이온

영적 깨달음, 금욕, 방종으로 흐른 영지주의
초대교회에 나타난 이단을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영지주의’다. 요한1서 4장 1절~3절 말씀이 이를 경계하기 위한 말씀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지금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영지주의가 기독교안에서 분명한 사상체계로 등장한 것은 2세기였지만 그 전의 이교도가 갖고 있던 이원론적 종교 사상에서 역사적 근원을 찾을 수 있다. ‘육체는 영혼의 감옥이다’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의 구원론은 ‘물질세계에 구속되어 있는 영혼의 해방’이었고 인간의 영혼들을 물질세계에 갇혀 있는 상태에서 해방시켜 줌으로써 그들을 영적 세계로 귀환시키는 것이었다. 물질 세계는 해방돼야 할 악이자 가장 저급한 단계였기에 영원한 진리이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체를 입었다는 ‘성육신’ 교리를 영지주의자들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이 가치관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려는 주장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현론적 기독론(Docetic Christology)이 그래서 등장한다.

이들은 “그리스도는 인간의 형태를 취할 수가 없었다. 그가 지상에 나타났을 때, 그는 다만 육체적 모습을 가진 것처럼 보였을 뿐이었다고 그들은 말했다. 동시에 영지주의자들은 또한 이 그리스도는 고통을 당하지도, 죽지도 않았다고 가르쳤다.”(벵트 헤그룬트/ 박희석, 신학사, 성광문화사, 1989년, 49페이지).

물질세계, 육체를 ‘악’으로 보는 영지주의자들에게 성자 하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성육신 교리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았다. 영지주의자들은 3가지 특징을 보였다고 한다. 영지주의는 ‘특별한 지식’(신비한 영적 지식)을 가진 자가 구원을 받는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다. ‘특별한 지식’, 곧 ‘영적인 지식’을 통해 구원받기 때문에 신비적인 차원으로 들어가기 위한 ‘신비 예식’이 발달했었다고도 한다. 이 신비의식 중에는 기독교적 성례들을 왜곡시킨 형태인 세례의식과 성찬 이외에도 이와 성격이 비슷한 성례의식들이 있었다(위의 책, 49p).

▲ 채찍으로 등을 때리는 고행에 노출된 어린이들

금욕적 태도도 있었다. 영적인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육체는 이를 방해한다. 따라서 육체적 금욕을 통해 육체를 제어해야만 영적 씨앗이 성장해 충만한 상태(플레로마)로 들어가게 되고 구원을 얻게 된다고 가르쳤다(라은성, <정통과 이단>, 그리심, 2006년, 40페이지). 이와 정반대로 영혼이 물질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견지에서 사람의 외적 행동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자유방임적 특징, 방종적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즉,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영은 그 죄와 무관하다는 생각이 쾌락주의로 흐르게 했다고 한다.

영지주의적 문제는 현대 교회안에서도 종종 발견된다. 우리는 기독교회 안에서 영성훈련이란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자아파쇄, 고행, 금욕이 그리스도에게 이르는 고차원적인 깨달음이라고 생각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가? 영성훈련이라는 미명아래 일부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기 위해 자아를 버려야 한다며 극단적 훈련을 병행하기도 한다. 반대로 구원을 받으면 자범죄를 아무리 죄를 지어도 천국에 가는 데 지장을 받지 않는다며 방종적 메시지를 전하는 흐름도 있다. 둘다 양극단에 속하는데 이미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보여줬다.

필자는 기독교 언저리에서 기생하는 단체들에서 ‘자아 버리기’나 ‘고행’, ‘금욕’적 태도를 목격한 경우가 적지 않다. 어떤 단체는 교주가 요구하는 물음에 빨리 답하지 않으면 머리를 ‘쿵’하고 울릴 정도로 맞는 곳도 있었다. 신도들은 교주가 머리를 때리는 순간 사탄이 빠져 나간다고 그것을 달게 받아들였다. 필자도 2004년도에 그곳을 방문할 기회가 있어서 교주의 손으로 한번 맞아봤다. 교주가 주먹을 쥐고 머리를 ‘쿵’하고 내리쳤다. 순간 코끝이 찌릿하게 아려왔다. 요즘 세상에선 멱살만 잡아도 ‘폭행’이다. 그러니까 이런 곳은 교주가 ‘쿵’하고 때리면, 즉 ‘폭행’하면 사탄이 빠져나간다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이런 기독교 언저리의 비상식적 모습은 자아를 버리고 교주가 때리더라도 맞으며 순종하는 게 진리에 이르는 길로 받아들여지는 ‘고행’의 또다른 모습이다.

충남의 모 기도원을 2004년도에 방문했을 때다. 기도원 원장의 인도에 따라 40여 명의 사람들이 춤을 추며 찬양을 하고 있었다. 신도들은 팔을 휘두르거나 위아래로 방방 뛰고 박수를 치는 등 다양한 모습으로 춤을 췄다. 찬송하는 내내 집회 장소를 빙글빙글 도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뛰어서 도는 사람, 속보로 걷는 사람, 천천히 걷는 사람 등 각양각색이었다. 참석자 중 1/3은 앞에서 일어서서 춤추고 1/3은 집회 장소를 빙빙 돌고 1/3은 그냥 앉아 있었다. 그중 집회 장소를 빙글빙글 도는 사람에게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라고 묻자 그에게선 “이런 행위를 통해 내 자아가 깨지고 성령의 영력을 공급받게 된다”고 답이 나왔다. 자아 파쇄를 위해 집회 장소를 빙글빙글 돌고 있다는 것이다.

2008년경 취재한 한 선교단체(통상적으로 알려진 대학교 선교단체와는 무관한 단체임)에서는 영성훈련을 한다며 오줌을 참는 훈련도 병행했다. 이 단체에선 특정 기간 훈련을 할 때, 아무도 화장실에 못 가게 했고 그 결과 바지에 소변을 배출하는 경우가 다수 발생했다. 이에 대해 질문하자 선교단체의 관계자는 “생리적 욕구를 이용해 사탄이 방해를 할 수도 있다. 주님이 일하시려는데 생리적 욕구가 급해서 나가게 되면 그 사람이 생명을 공급받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집중력도 흐트러트린다. 그래서 강도 높게 훈련한 경우가 있다”고 답변했다. 이런 행위가 ‘영성훈련’ 또는 ‘생명’이라는 가면을 쓴 현대판 영지주의적 금욕·고행 아닐까?

고행과는 반대로 어떤 죄를 지어도 구원과 무관하다는 주장도 있다. 정동섭 교수는 2014년 4월 23일 <교회와신앙>과의 인터뷰에서 “구원파의 핵심교리를 다시 정리하자면 ‘영혼이 구원받았으므로 몸으로 무슨 행동을 하든지 간에 그것은 구원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며 “몸이 사기를 치고 살인을 해도 구원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 죄책감이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초대교회 때 발생한 영지주의는 지금도 각종 가면을 쓰고 우리 주변을 서성이고 있다.

“진리의 영을 받은 내가 보혜사”··· 몬타너스

▲ 1992년 10월 28일 예수 재림을 전하는 신도

몬타너스는 2세기 후반에 등장한 인물로서 여러 가지 면에서 흥미롭다. 그는 최초의 시한부 종말론자였다. 그리고 직통계시자였으며 ‘은사주의자’(?)였다. 그리고 자신의 설법을 대변해 줄 여성 ‘영매자’ 2인을 뒀다. 특정 지역을 ‘성지’로 삼아 공동체 생활까지 했다. 그의 면모를 살펴보면 현대 이단들의 축소판을 보는 듯하다. 지금부터 2천여년 전의 일이라 교회사 책을 통해서만 접할 수 있는 몬타너스다. 각종 기록들을 통해 그의 면모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몬타너스라는 사람이 스스로를 거룩한 영의 화신, 즉 제 4복음서에서 장차 일어날 일을 계시해 준 것이 ‘진리의 영’이라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많은 열광적 신자들이 그 사람 주위로 모여 들었는데,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환상의 체험을 하였다. 그들은 그 환상을 하느님이 보여주시는 것이라고 확신하였으며, 심지어 그러한 환상의 체험을 ‘제 3의 성서’라고 부르기까지 하였다. 그들이 본 환상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의 임박한 도래였다. 새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와 프리기아 지방에 임할 것이며, 그리하여 이 도시는 성도들이 거처하는 집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몬타누스 주의자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프리기아로 모이게 했으며, 그곳에서 금식과 기도와 뼈를 깎는 참회 가운데서 재림을 기다렸다.”(노만 콘/ 김승환 역, <천년왕국운동사>, 한국신학연구소, 1993년, 27페이지).

“몬타너스(Montanus)였는데, 그는 전에 큐렐(Cybele) 여신의 신부였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몬타너스는 이교에서 신비스런 황홀경에 들어가는 아주 발달한 소질을 가지고 그리스도교에 들어왔다. 이 소질을 그는 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 바울의 때에 고린도 교회에서 성행하였고, 그후에도 아주 없어지지 않았던 예언 혹은 방언 또는 계시의 형식으로 쉽사리 연결시킬 수 있었다.

이 예언과 방언을 말하는 그의 독자적인 이성이나 인격에는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다만 그를 포착한 영의 불러 주는 말을 사실상 그대로 받아 말하는 것 같이 보인 것은 몬타너스 설법의 큰 특징이었다. 몬타너스의 말에 따르면, 이 예언은 아주 새로운 무엇이며, 또 그리스도의 계시에 대치하는 성신의 새로운 시대의 시작의 징조라는 것이다. 사실은 마치 예수가 로고스의 성육신이었던 것 같이 몬타너스 자신은 성신이 몸을 이룬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면서 설교하였다.

그와 같이 일한 두 여자의 이름은 브리스길라(Priscilla)와 맥시밀라(Maxmilla)였는데 이들은 몬타너스와 비슷한 소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이 세 사람은 프리지아의 그리스도인들을 자기들의 수레에 싣고 이상한 모험을 시작하였다. 특히 이 두 여인들은 몬타너스의 용인 하에 남편과 가정을 버리고 이 운동을 위하여 헌신하였다. 안토니 황제의 심한 박해로 말미암아 폴리캅이 순교할 무렵 세 사람은 말세가 임박하였으니 천년 왕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는 메시지를 전하며, 다녔다.

새예루살렘은 하늘에서 내려와서 지구의 인구조밀한 곳을 멀리 피하여 복잡하지 않고 조용한 곳인 먼 서쪽에 위치한 페푸자라는 작은 촌락 가까운 들판에 임재할 것이라는 예언이었다. 그들은 여기에 새예루살렘이 도래한다고 선언하고, 그를 준비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예언을 따르던 사람들을 이끌고 나갔다. 그들은 열심히 소리지르며 기도하였으며 예언을 듣고 황홀경에 빠져 들어갔다. 이와 같이 하면서 그들은 페푸자 들판에서 새예루살렘을 영접할 이상한 단체를 조직하였다. 그들은 세상의 모든 관계를 끊고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준비를 하였던 것이다. 사랑하던 처와 자녀들과 가산과 소유물도 다 저버리고 황홀경에서 엄격한 금욕생활과 신비경험을 얻는데 몰두하면서 그들 자신들이 새시대인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일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이 새예루살렘인 하늘의 성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들은 페푸자에 여전히 버티고 그곳을 보혜사 성령의 본부라고 주장하며 손수 땀흘려 만든 그 새도시에 정주하며 신비운동을 계속 전개했었다. 계속하여 많은 대중들도 그 예언을 믿고 따르며, 전파하여, 아시아의 몇 동네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다 빼앗기게 되었다. ··· ”(J.W.C완드 지음/ 이정석 번역, <교회사>, 1960, 81p).

“그들은(몬타너스, 브리스가, 맥시밀라) 보혜사의 대변자라고 주장하였다. 때때로 그들은 구약의 선지자처럼 일인칭의 표현으로 소위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인간은 수금이다, 나는 채처럼 그 위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새로운 예언’이었다. 그들의 신탁을 통해서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박해를 즐거이 맞이하라고 촉구하였다. ‘침상에서 죽기를 바라지 말라. ··· 순교자로서 죽기를 소망하라.’ 몬타누스파는 고울과 아프리카에서 영광스럽게 순교하였다. ···

몬타누스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금욕주의를 강요했다. 순결을 좋아하여 부부간의 관계는 포기되었고 금식이 늘어났으며, 맛이 없는 음식을 먹었다. 브루기아의 페푸자와 티미온에 있던 몬타누스파의 거룩하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공동체는 ‘예루살렘’으로 명명되었다. 맥시밀라는 ‘나 이후에는 예언이 없을 것이요, 다만 종말이 있을 뿐이다’라고 예언했다.
···
몬타누스파는 아프리카에서 5세기까지 존속하였고, 브루기아에서는 더 오래 지속되었다. 교회는 그들을 제외시킴으로써 많은 신자를 잃었다. 그들의 지나침에도 불구하고 몬타누스 파는 성령께서 처음과 같이 그 당시의 교회 안에서도 역사하신다는 신념을 위해 싸웠다. 그들에 의하면 성령의 역사가 크게 나타나는 것은 ‘말세’를 위하여 약속된 것이다(라이온사 편/ 송광택 번역, <교회사핸드북>, 1989, 74p.).

“170년 무렵 소아시아에 몬타누스라는 기독교인이 나타났다. 그는 자신이 중요한 새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였다. 그와 그를 따르는 두 여인이 드리는 예배는 점차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면서 한 세기 가량 소아시아를 풍미하였다. 그들은 성서적 계시 이외의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카리스마적인 인물로 부상시켰다. 몬타누스는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는 다른 기독교인들보다 높은 윤리적 행동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만이 올바른 기독교인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들을 배척하는 것은 하느님을 배척하는 것이라고 믿었다(이러한 양상은 다른 많은 이단들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전형적인 현상이었음). 그들이 주장하는 이른바 ‘새로운 예언’의 내용은 오늘날의 입장에서 보면 납득하기 어려워 보인다. 즉 그들은 하늘나라가 소아시아에 있는 그들의 마을 프리지아로 곧 내려온다고 했던 것이다.

그들의 신앙 증언이 너무 강력했으므로 많은 무리들이 그들을 따랐다. 그 가운데에는 북아프리카의 호전적인 변증가 테르툴리아누스도 끼어 있었다. 테르툴리아누스는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도 스스로를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신자들에게 염증을 느낀 나머지 몬타누스주의쪽으로 기울었던 것이다.”(마이클 콜린스·매튜 프라이스/ 김승철 옮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기독교 역사>, 시공사, 2001, 43p).

170여년 나타난 몬타너스에 대해 교회사에 등장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새 계시를 받았다고 말했다. 마치 하나님의 영이 직접 그에게 음성을 들려 주고 그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서 말하는 방식이었다고 한다. 특히 그가 ‘일인칭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는 점이 주목된다. 즉 “내가 하나님께서 너에게 금식하라고 명령하시는 것을 들었다”는 3인칭 표현이 아니었다. 일인칭, “얘야, 너는 지금부터 금식해야 한다”는 식으로 하나님이 직접 말하는 특징을 보였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몬타너스는 큐렐이라는 여신의 사제 출신이었다고 한다. 이교 출신자였던 만큼 ‘황홀경’, 신접하는 습성을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버리지 못한 듯하다. 황홀경, 즉 영적 체험을 추구했고 그러다 직접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었다. 아마도 그와 함께 했던 브리스길라와 맥시밀라라고 하는 여성 영매들도 그리스도의 재림과 관련한 영적 체험을 분명히 했을 것이다. 특정 장소도 지명했다. 페푸자라는 작은 촌락 들판에 그리스도가 재림하며 새예루살렘이 임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들은 엄격한 금욕주의를 표방했고, 재림을 맞을 준비에 불필요한 것들은 버리기 시작했다. 몬타너스파의 예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랐는데 아내와 자녀와 가산과 소유물을 다 버리고 촌락으로 들어와 황홀경에 들어가는 체험을 추구했고, 엄격한 금욕생활을 했다고 한다.

혹시 생각나거나 떠오르는 이단이 있지 않은가? 1992년 10월 28일의 시한부 종말론자들이다. 이들은 이름만 바꿔서 나타난 현대판 몬타너스로 보일 정도다. 시한부 종말론자들도 직통계시, 황홀경·영적 체험, 재림 날짜 지정, 가산과 소유물 처분, 금욕 등 여러모로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가 1992년 공전의 히트를 칠 때 시한부 종말론자들에게도 ‘아이들’이 유명세를 떨쳤다. 주로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던 사람들은 서울 숭인동에서 활동하던 몇몇 어린 학생들을 일컬어 ‘숭인동의 아이들’이라 했다. 이들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준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심성을 가졌다는 것이다. 이 아이들에게 성령께서 말세의 환상과 계시를 불어 넣어준다고 했다.(이장림,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 그루터기, 1988년, 12쪽).

시한부종말론의 대표주자 이장림 목사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 바 있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과 롯이 소돔성을 떠나던 날은 우리에게 구원의 문이 닫힐 시각이 있음을 경고해 주고 있다. 주님이 곧 오신다고 아무리 외쳐대도 교회는 그 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으니 가슴 아픈 일이다. 심령이 마비되어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여기저기서 하늘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하늘의 음성을 듣고 계시를 받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환상을 보고 예시적 꿈을 꾸고 미래를 말한다. 종말의 징조들이 하늘에서 땅에서 폭발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때에 아직도 심령이 어두워서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역사의 시간이 멈출 때가 되었음을 일러 주려고 서둘러 이 책을 썼다.”(이장림, <하늘문이 열린다>, 다미선교회 출판부, 1988년, 7쪽).

“이미 문자화된 성경 말씀만 믿겠다며 이런 계시는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예언과 계시는 이미 1세기로 끝났다며 이런 책을 쓰거나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을 오히려 우습게 여기고 이상하게 생각한다. 그래서 기회만 있으면 계시 시대가 끝났다며 강단에서 치는 설교를 하기가 일쑤다. 그러나 무엇인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까울 때가 많다. 그런 사람은 성경! 성경! 하고 다니지만 실제로는 성경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종이 아니다. 마지막 시대의 이 메시지를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아라.”(이장림, <하늘문이 열린다>, 다미선교회 출판부, 1988년, 118쪽).

당시 시한부 종말을 주장하던 사람들의 집회에 가보면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 아이들이 집회 장소에서 “지금 이 집회 장소에 불칼을 든 천사가 지키고 서 계십니다. 천사들이 이 시간 내려와 우리의 찬양을 하나님께 올려 드리고 있습니다”라고 주장하는 등 자신들이 본 환상을 공적 집회 중에 얘기하기도 했다. 밤샘 철야를 통해 그들은 열성적으로 기도했고 이들 중 많은 수가 하나님의 음성, 환상 등을 통해 ‘1992년에 주님이 오신다’는 계시를 받는다. 몬타너스가 환상과 계시를 받고 종말이 올 것이라고 했던 것과 하나도 바뀌지 않은 양식이다. 그 모습 그대로, 몬타너스 사후 1800년이 지나기까지 나라와 종족만 바뀌었을 뿐 똑같은 양상이 그대로 재현된 것이다. 그리고 10만여 명의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던 사람들이 시한부 종말을 추종했고 그 결과는 대국민 사기극으로 드러났다. 1992년 10월 28일 휴거를 주장했던 이장림 목사는 사기 혐의로 징역을 살게 된다. 당시 그는 34억원의 헌금을 착복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휴거될 마당에 34억원이나 되는 거액은 왜 은닉해 놨을까?

평범한 인간 예수가 진리의 영을 받아 '시대의 목자'로··· 에비오니즘(서기 66년경)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한 영지주의적 가현설(도케티즘)이 헬라철학을 바탕으로 나왔다면 에비오니즘은 유대적 배경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한 사상이다 – 이들은 갈라디아서에서 비판한 유대적 기독교 율법주의로 분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양자설’이라는 독특한 사상 때문에 따로 분류 - 에비온주의자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아담이나 모세와 유사한 형태의 ‘참 선지자’였을 뿐이다. 즉 단순히 사람에 지나지 않는 자였다. 에비온주의는 그리스도를 순수한 인간적 차원에서 인식하고 예수가 그의 세례시 혹은 부활한 때와 같은 시기에 양자로 되기 전까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고 주장하는 기독론의 원형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 특정 사건, 세례를 통해 하나님의 아들 양자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상은 사모사타의 바울(268년경)에게서도 나타난다. 사모사타의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기를 그분은 단순한 인간이었는데 매우 도덕적인 삶을 살았고, 세례를 받으면서 이적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면서 하나님과 교제하게 되었다는 사상을 퍼트렸다. 이런 사상은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제시하는 것으로서 사람이 신성과 연합하고 그 반열에 들어갈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사상으로 다가올 수 있다(라은성, <정통과 이단>, 그리심, 2006년, 73페이지). 에비오니즘과 사모사타의 바울의 주장은 곧잘 ‘양자설’로 설명되기도 한다. 양자설이란, 그리스도는 원래 보통의 인간이었는데, 세례를 받을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인류구속(人類救贖)의 사명과 그 능력을 부여받아 하나님의 양자가 되었다는 설이다(두산백과).

세례를 받은 후 신성과 연합한 후 예수가 그리스도로서 활동했다는 원형을 제공한 에비오니즘이나 사모사타의 바울의 사상은 역시나 현대에도 반복된다.

▲ 신천지의 노정 순리를 나타낸 그림

신천지의 노정 순리 교리와 ‘영은 육을 들어쓴다’는 보혜사 교리에 이와 유사한 사상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신천지의 노정순리는 하나님이 한 목자를 선택해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 후에 배도자와 멸망자가 나와서 그 세계를 멸망시키면 다시 하나님이 새 목자를 구원자로 택하여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신다는 교리다.그러한 노정(과정)을 통해 아담 세계 → 노아의 세계 → 아브라함의 세계 → 모세의 세계 →예수님을 통해 ‘영적 이스라엘’ 세계 → 약속의 목자 이만희를 통해 ‘영적 새 이스라엘’인 신천지 시대가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보혜사 교리는 영은 육을 들어 쓰는데, 진리의 영이 아담에서 예수까지 이어졌다가 이제 마지막 때에 이만희 교주에게 임해서 그가 이 시대의 약속의 목자이자 또다른 보혜사가 됐다는 발상이다. 이런 신천지식 사고는 이미 에비오니즘에서 원형이 발견된다고 볼 수 있다. 평범한 인간 예수가 진리의 영을 받아 참 선지자로 도약한 것처럼 이만희 교주도 유사한 주장을 한다는 점에서다.

정명석 교주가 주장하는 시대별 구원자론의 경우 아담, 노아, 모세, 예수가 모두 그 시대의 구원자였고,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정명석 교주가 이 시대의 구원자라는 시대급 구원을 말한다. 그런 점에서 에비오니즘과 유사하다.

“예수는 하나님이 아냐!” 아리우스(250년~336년)
초대교회사에 나타난 이단 문제중 역사적으로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리우스다. 라은성의 <정통과 이단>에 따르면 아리우스는 ‘양자론’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엘리트적인 마음을 가졌던 그는 사람들에게 도덕적인 삶을 살면 신적으로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수도적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 곧 도덕적인 삶을 살면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유혹을 던졌던 것이다. 그 사상의 바탕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도 인간이었는데 도덕적인 거룩한 삶을 살았으므로 세례를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람들에게 제시했던 것이다. 사람이 신성과 연합하고 그 반열에 들어갈 수 있고, 거룩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은 엘리트들과 주위 사람들을 손쉽게 유혹할 수 있는 것이었다(라은성, <정통과 이단> 그리심, 2006년, 73페이지).

▲ 잘못된 삼위일체 도표

아리우스는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대신 하나님은 한분이고 나누어질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하나님일 수 없으며 필시 피조물의 일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보다는 열등하나, 인간보다는 뛰어난 하나의 중간자로 간주했다. 아리우스의 주장과 관련한 논란은 320년경 동방교회 전체로 확산됐다가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를 통해 배격된다. 이때 사용된 유명한 개념이 ‘동일본질’, ‘유사본질’ 논쟁이라고 할 수 있다. 동일 본질은 예수께서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하나님’이다는 아타나시우스의 견해로서 니케아신조로 정리된다. 반면 유사본질은 예수는 하나님과 유사하지만 동일하지 않다는 아리우스의 견해였다.

“독생자, 그 아버지의 독생하신 아들··· 그는 바로 하나님의 하나님이시고, 빛중의 빛이요,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 되시므로, 낳으심을 입었고, 창조되지 않았으며 아버지와 한 본체를 이루신 분이로다.” 아리우스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아들이 존재하지 않았던 때도 있었다고 말하는 자들, 그가 탄생하시기 전에는 계시지 않았다고 말하는 자들, 그가 무에서 지으심을 받았다고 하는 자들, 아들이 아버지와 다른 본질, 혹은 본체에 속한다고 하는 자들, 혹은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되었거나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하는 자들을 보면 교회는 저주하는 바이다.”(벵트 헤그룬트/ 박희석, 신학사, 성광문화사, 1989년, 105페이지).

▲ 여호와의 증인들의 삼위일체관

여호와의 증인의 삼위일체관은 아리우스주의를 원형으로 한다는 견해도 심심찮게 나온다. 여호와의 증인은 하나님은 오직 성부 하나님 한분이시며 성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이라고 주장한다. 성령 또한 하나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당신의 종들을 감동시키는 보이지 않는 능동적인 영향력”의 개념으로 보고 있다. 성령의 인격이나 신성을 모두 부인한다. 그런 점에서 여호와의 증인 또한 역사 속에서 갑작스레 나타난 사람들이 아니라 이미 1700여년 전 초대교회의 역사 속에 등장한 사상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니케아 신조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확립됐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사실상 아리우스의 신관을 옹호했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절대 군주였다. 따라서 성부도 하나님이고, 성자 예수님도 하나님이고, 성령 하나님도 성부 하나님과 동일하다는 삼위일체 신관은 대로마제국을 다스려야할 절대 권력자에게는 설득력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고, 절대권력을 유지하는 데 도움도 되지 않는 사상으로 보였을 것이다. 서슬 퍼런 절대 권력자는 아리우스를 옹호했지만 교회는 ‘아타나시우스’의 손을 들어줬다.

▲ 삼위일체를 적절히 나타낸 것으로 평가 받는 그림

지금까지 초대교회사에 등장했던 이단 사상 중 극히 일부만을 살펴보았다. 유대적 기독교 율법주의, 영지주의(도케티즘), 몬타너스, 에비온주의, 아리우스 등이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거나 이단에 대해 무관심했던 분들은 이들의 이름이 생소하게 느껴질 거다. 쉽지 않지만 이들의 명칭을 기억하는 게 좋다. 이름을 잊더라도 초대교회에서 그들이 보였던 핵심적 특징만큼은 기억해봤으면 좋겠다. 교회사를 공부할 때 반드시 접하는 사람·사상이어서만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현대판 이단 중, 교회사에서 나타난 이단들의 특성을 벗어나는 게 거의 없다는 점에서다. 알리스터 맥그라스는 자신의 책 <그들은 어떻게 이단이 되었는가?>의 첫장에 “역사가 그러하듯 이단은 스스로 반복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고 써놨다. 이단들의 습성은 2천년이 지난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이쯤에서 다시금 자연스레 되새기는 말씀이 있다. 해 아래 새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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