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 Narroway는 이슬람 연구와 아랍어 공부를 목적으로 중동의 한 국가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던 그에게 담임인 A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앞으로 네가 목회할 때는 이슬람 모르고서는 힘들 거다. 그 중요성에 비해 한국교계에 이슬람 전문가가 턱없이 부족하다. 주어진 기간 열심히 공부하고 무슬림들도 많이 만나 보거라. 세계적으로 사고하고 지역적으로 행동하는, 글로컬한 리더가 되어야 한다.” 담임 목사의 이런 염원을 따라 그는 중동의 한 국가에 거주하며 시리아 난민으로부터 아랍어를 배우고 있다. 필자는 “이슬람을 이해하기 위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여 달라는 부탁을 드리고 싶다”며 “세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국제 분야의 뉴스들이 이제 기도제목이 될 것이다. 수염을 기르고 히잡을 쓰고 우리 곁을 지나가는 무슬림들이 다르게 보일 것이다”고 제안한다. 3회에 걸쳐 ‘이슬람 이해’에 도움을 주는 필자의 추천 도서를 연재한다.[편집자주]
2015년을 뒤돌아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는 국제이슈가 무엇인가? ‘IS의 등장’을 손꼽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9.11과 오사마 빈라덴으로 유명한 글로벌 테러단체 ‘알 카에다’의 이라크지부였던 IS는 2014년 6월 29일 스스로를 국가로 선언하고 연이은 끔찍한 사건들을 자행함으로 국제사회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탁월한 선전기법들을 통해 전 세계 테러단체들을 규합함으로 급속히 세력을 불린 이들은 2015년 들어 시리아내전에 적극 개입하여 몇몇 주요도시들을 점령한 상태이다. 2015년 한해에만 100만 명, 시리아에서 쏟아져 나온 난민들이 유럽으로 향했고, 해변에 얼굴을 묻은 채 발견된 세 살 배기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은 우리 모두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독일정부의 환영과 난민들을 향한 동정여론이 피어나던 찰나, IS는 파리도심에서 최악의 테러를 벌임으로 난민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렸던 유럽사회를 움츠리게 만들었다. 난민들 틈바구니에 테러범이 있다면 그 누가 안심할 수 있겠는가? 의심의 눈초리 속에 국경은 닫히고, 수많은 난민들은 이 차디찬 겨울 정처 없이 떠돌고 있다. 시리아 난민사태로 인해 크게 부각되지는 않았지만 올해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도 격화되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3차 인티파다가 일어나는 것 아니냐는 우려를 낳고 있다. 이런 와중에 사우디아라비아에서는 건국 이래 처음으로 여성이 출마와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지방선거가 열렸고, 이라크에서는 미스이라크 선발대회가 개최되는 등 변화의 조짐도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43년 만에 탄생한 이 미스 이라크에게 IS에 가담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전화가 있었다고 한다. IS는 국제사회의 공공의 적이 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이슬람’을 향한 사람들의 시선 역시 부정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상대방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대화와 갈등해결의 기본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육신을 닮아가길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상대가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현실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며 함께 아파할 수 있는 자세가 요구된다. 사탄의 종교라고 치부하기엔 전 세계에는 16억 명의 무슬림-그들 대부분은 이웃과 나그네에게 친절하며 서구사회보다 훨씬 가정적이며 술도 마시지 않는 선량한 사람들이다-이 있으며, 스스로 이슬람국가임을 자처하는 수십 개의 국가가 있음을 기억하자. 도대체 이 이슬람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왜 이런 전쟁과 테러가 끊이지 않고 일어날까? 이런 사건들의 저변에 놓인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어떤 역할을 하는 것일까?
미군전투기가 중동 일부 지역에 폭격을 가한다고 해서 전 세계 테러가 종식될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최근엔 세계 각지에서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는 자생적 테러범이 양산되고 있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그들을 이끄는 세계관과 역사적 상황을 이해하고 엉킬대로 엉킨 실타래를 천천히 풀어내지 않고서는, 서로를 향한 증오 속에 끝도 없는 폭력사태가 이어질 뿐이다. 영화 ‘암살’을 기억하는가? 일본의 입장에서는 엄단해야할 테러행위가 우리네 입장에서는 피눈물 나는 독립운동이었다. 테러리즘은 누군가의 해방투쟁일 수 있다. 물론 IS의 잔혹한 행위는 어떤 말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을 그런 상황까지 이끌고 가는 역사적 상황, 이념과 사상은 무엇일까 고민해보아야 한다. IS라는 쓰디쓴 열매가 맺히기까지 이어진 뿌리와 줄기와 잎사귀가 있다는 말이다. 그 전체를 파악하지 못하면 IS라는 열매를 잘라내 봐야 또 다른 줄기에서 다른 열매가 손 쓸 겨를도 없이 잔뜩 맺혀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이 총체적인 시각을 갖고 이슬람을 대하지 못하는 한 가지 이유는 정교분리가 확실하고 여러 종교가 평화롭게 공존하면서 경쟁하는 아주 독특한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이라는 종교는 주일에 절에 가는가, 교회에 가는가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슬람은 종교, 정치, 문화를 아우르는 특정한 문명체계를 일컫는다. 그나마 우리가 이해하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르네상스 이전의 유럽역사와 기독교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된다. 둘을 분리해서 말하는 건 불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이슬람이라는 종교와 중동-아랍권 역사를 분리해서 말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접근이 단순하지 않고 많은 공부가 필요한 이유다.
이런 맥락 속에서 적극 추천하고 싶은 세 권의 책이 있다. 세 권 모두 신앙서적이 아니며, 두 권은 무슬림이 저자이다. 무슬림의 글을 읽으라고? 꾸란 한번 읽는다고 우리 신앙이 흔들릴 일은 없으니 안심하고 읽어보자. 이슬람세계 바깥에 있는 우리는, 우리의 잣대로 그들을 평가하거나 혹은 제3자가 전해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경청할 필요가 있다. 함께 울고 웃고 아파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운데, 그들 역시 우리와 같은 성정-더 악하지도 더 선하지도 않은-의 사람들이며 진정 그들을 돕는 길이 무엇일지 발견하게 된다고 믿는다. 그리고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 깊은지, 왜 예수님만이 구원의 길이며 평화의 왕이신 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첫 번째 책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는 제목 그대로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역사학자가 세계사를 중동의 관점에서 기록한 책이다. 아시아를 중동과 극동으로 부르는 이유를 생각해본 적 있는가? 우리나라 사람에게 익숙한 세계지도에는 한반도가 지도 한가운데 위치한다. 그러나 유럽 사람들의 세계지도에는 유럽이 중심에 놓이고 아메리카대륙을 왼편에 놓는다. 즉 아시아를 중동과 극동으로 나누는 것은 유럽의 관점인 것이다. 호주에 살던 맥아더라는 사람은 학창시절 세계지도를 거꾸로 뒤집어 그리는 바람에 선생님으로부터 꾸중을 들었지만, 졸업 후 그 지도를 사업화하여 많은 수입을 얻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라. 우주공간에 떠있는 지구라는 별에서 어디가 위쪽인지를 누가 결정하는가? 어떤 기준이 선진국, 개발도상국, 후진국을 분류하는가? 근대화, 현대화, 문명화라는 것은 누구의 관점을 반영하는 말인가?
이 책의 저자인 타밈 안사리가 갖고 있는 이력이 이 책의 매력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10살 무렵 자신이 살던 시골동네에 세계적인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가 지나가게 되었고, 자신에게 ‘인류이야기’라는 역사책을 선물했다고 한다. 흥분 속에 그 책을 읽으면서 한 가지 의문이 마음 깊숙이 자리하게 된다. ‘인류이야기’라는 ‘세계역사’책에 자신의 위치를 찾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서구중심의 기록 속에서 아프가니스탄이 등장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후 40년이 지나고 역사학자가 된 타밈은 미국 텍사스에서 세계사 교과서의 집필을 의뢰받는다. 최종결과물을 두고 자문위원의 검토를 거치면서, 이슬람관련 분량은 점점 줄어들어 30단원 중에 고작 1개의 단원으로 축소되었다. 타밈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거의 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수십억명의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이슬람 문명이 세계사 속에 너무 초라한 모습으로 소개되는 게 의아했다. 그리고 그 교과서가 출판된 지 정확히 1년 뒤 9.11사태가 일어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질문하며 역사책을 펼쳤지만, 기존의 세계사 책을 통해서는 답을 찾을 수 없을 터였다. 타밈은 그래서 직접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를 통해 평행세계사의 잃어버린 반쪽을 소개하고자 했다.
타밈은 말한다. ‘여기 거대한 세계 둘이 나란히 존재한다. 놀라운 점은 두 세계가 서로를 얼마나 모르는 가다. ... 이슬람세계와 서구는 서로 따로 존재하는 두 개의 우주 같았다. 각자 내부의 문제들로만 바빴고 각자 자신이 인류 역사의 중심이라고 여기며 각자의 흐름대로 살아오다가 17세기 후반에야 두 내러티브가 교차하기 시작했다.’ 결국, 서구 입장에 ‘산업혁명 - 민족국가의 부상과 제국주의 - 1,2차 세계대전 - 냉전시대 -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로 이어지는 근현대사의 내러티브가,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오스만 제국 - 서양의 동양 침투 - 개혁운동 -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 이슬람주의의 반발’로 이어지는 내러티브가 된다. 서구의 승리는 중동의 패배였으며 그 반발로 일어난 여러 갈래의 운동들이 상호충돌을 일으키기에 복잡한 중동의 현실을 낳고 있다는 설명이다.
마치 조선 말 대한제국 시절, 강력한 서구문명 앞에 대응책이 오락가락했던 우리의 모습처럼 이슬람문명에서도 각기 세 가지 흐름이 생겨났다.
1) 서구의 영향을 차단하고 이슬람의 원래의 신성한 형태로 되돌리자는 ‘이슬람 근본주의’
2) 서구가 옳으며 이제 미신을 버리고 서구의 행렬을 좇아 이슬람을 근대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속 근대주의’
3) 이슬람이 진정한 종교인 것은 진실이지만 서구에서 배워야 할 점도 있다고 절충안을 제시한 ‘이슬람식 근대주의’
오스만제국이 무너지고 1,2차 세계대전 사이만 해도 하루 빨리 서구를 따라잡자는 세속근대주의가 더 힘을 얻었다. 하지만 2차 대전 이후 이스라엘과의 분쟁 속에서 근본주의는 점점 과격화 되었다. 냉전체제 속에서 움츠려있던 근본주의자들은 결정적 반격을 준비하며 힘을 모으고 있었고, 소련군이 물러난 아프가니스탄은 그 분출구가 되었다. 타밈은 이런 말로 책을 마무리한다. ‘미국의 보수파 역사가 프란시스 후쿠야마는 소련의 몰락이 단지 냉전의 종식을 뜻하는 것만 아니라 역사의 끝을 의미한다고 했다. 자유주의 자본주의자들의 민주주의의 승리를 가뒀으니 이제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덤빌 수 없으며, 남은 일이라고는 세계 전체가 유일한 진리를 향해가는 기차에 오르는 동안 주변을 정리하는 것뿐이라고 말이다. ... 그날, 2001년 9월 11일, 두 개의 세계사는 충돌했고 그로써 한 가지 결론이 확실하게 내려졌다. 바로 후쿠야마가 틀렸다는 것이다.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