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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의 아들의 변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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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인'의 아들의 변절
  • 정윤석
  • 승인 2019.04.22 22: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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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 옥성호 대표, 이젠 안티 기독교?
▲ 2004년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설교하는 고 옥한흠목사
옥한흠 목사는 2004년 4월 11일 7만여명의 성도들이 모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 부활절연합예배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돼야 한다”고 역설했다. 옥 목사는 한국기독교의 타락의 본질을 예수를 믿기만 하고 그를 닮아가지 못했던 성도들의 느슨한 삶에서 찾았다. 그래서 그는 종종 제자훈련의 참된 목표는 성도들을 ‘예수처럼 살게 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제자훈련에 온 생을 바친 그를, 사람들은 ‘광인’으로 불렀다.

그 부활절 예배 후 15년이 지난 지금, 옥 목사의 아들 옥성호 대표(도서출판 은보, 이하 옥성호)는 완전히 다른 관점에서 기독교 타락의 본질을 찾아냈다. 옥성호는 기독교의 핵심교리가 갖는 모순에서부터 문제를 찾는다(54쪽, 240쪽). “신약성경은 히브리성경의 명확한 말씀을 아예 이해불가의 교리로 바꾸어 놓았다. 이해할 수 없는 교리는 기독교인 속에 멈추지 않는 내적 균열을 일으킨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모순을 품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순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340쪽).

▲ 2018년 11월 발간한 옥성호 대표의 '신의 변명'
2018년 11월 30일 출간한 <신의 변명>에서 옥성호는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보여준다. 이 책은 단순히 기독교의 모순을 비판하는 게 아니다. 그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거의 안티 기독교급으로 봐도 무방하다. 물론 그 또한 이런 글을 세상에 내놓기까지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이제 그를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보기 어려운 지경이 됐다는 건 틀림없어 보인다. 이 책이 그의 진심이라면 말이다.

옥성호는 ‘신의 변명’에서 성경을 두 가지로 나눈다. 통상 구약과 신약으로 구분하는 방식이 아니다. 히브리성경과 신약성경으로 나눈다. 이 두가지 세계관은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는 게 그의 견해다. 그는 신약성경을 궤변과 왜곡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의 전적타락(62쪽 이후), 삼위일체(119쪽~149쪽), 동정녀 탄생(117쪽, 229쪽~251쪽), 예수의 신성(120쪽), 초대교회사의 종교회의(137쪽), 구약성경의 메시아 예언(200쪽~224쪽) 등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송두리째 부정한다(하단 녹취록 참고).

부정하면서 동원한 단어들이 왜곡(238쪽), 거짓말(258쪽), 손질(263쪽), 창작(264쪽) 등이다. 이런 악행을 동원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창작해 낸 게 신약성경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하단 녹취록 참고).

<신의 변명>을 읽으면서 옥한흠 목사와의 대화가 기억났다. 2004년 어느날 옥 목사와 기자회견을 할 때였다. 자리의 특성상 가족 얘기를 할 분위기는 아니었다. 그래도 궁금해서 기자가 물었다. “목사님, 가족들에 대해 소개 좀 해주세요. 가정사역은 어떻게 하셨나요?” 되돌아오는 답변은 “나는 가정목회는 실패한 사람입니다”였다. 옥성호의 글을 보면 옥 목사의 말이 틀린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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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변명>은 기독교를 송두리채 부정하는 내용으로 가득합니다. 그중 극히 일부만을 공개합니다. 

“신상언이 이 책에서 설파한 사탄에 대한 생각은 곧 살펴볼 신약성경의 사탄관과 100퍼센트 일치한다. 그런 면에서 저자의 생각은 절대 성경적이지는 않지만 매우 신약성경적인 것은 분명하다”(24페이지).

“많은 기독교인에게 가히 충격적인 말이겠지만 유대교는 기독교를 다신교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크게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가 히브리성경에 없는 삼위일체성육신이라는 개념을 통해 예수를 하나님으로 섬기기 때문이다.”(33페이지).

신약성경의 사탄은 히브리성경 속의 사탄을 신적 존재로 진화시켰다. 그 결과 헬레니즘이 뿌린 이원론적 기독교사상은 책임지기 싫은 인간의 이율배반적 욕망을 자양분삼아 지난 2,000년간 인류를 지배할 수 있었다. 굴러온 기독교가 박힌 유대교를 몰아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43페이지).

사탄을 포함해 무수한 모순으로 뒤엉킨 기독교신학은 결국 인간 속에 내적 균열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오늘날 교회안에서 벌어지는 엄청난 가기 기만의 근본 원인은 다름 아니라 자기 모순의 기독교신학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신학은 ‘초월’이라는 이름으로 상식과 이성을 아예 포기하게 할뿐 아니라, 믿음과 은혜라는 재갈로 생각 자체를 멈추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 어디에서도 말이 안 되는 일들이, 교회 안에서는 얼마든지 말이 되는지도 모르겠다”(54페이지).

스스로 책임지는 인간관을 가졌던 시대에 아우구스티누스가 느닷없이 에덴동산에서 원죄설을 끄집어내자, 기독교 안에서조차 반론이 일었다. 그러나 정통은 반드시 옳아서 정통이 된 게 아니다. 숫자가 많으면 무엇이든 정통이 될 수 있고, 숫자가 적으면 어떤 진리도 한순간에 이단으로 낙인찍힐 수 있다. 정통과 이단을 가르는 것은 ‘누가 주류인가’에 달렸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설이 기존의 긍정적이고 책임지는 인간관을 밀어낸 데는 당시 정치 상황이 큰 역할을 했다.”(62쪽).

“‘뭐라고? 우리 인간에게 스스로 뉘우치는 능력이 있다고? 전적으로 타락한 인간을 뭐로 보고 이런 소리를 하는거야? 이사야 선지자, 이 사람 미친 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이런 선이 남아 있다고 생각한 거지?’  그래서 바울은 이사야의 말씀을 바꿔 버렸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에서 하나님은 분명하게 말씀한다. 인간은 얼마든지 스스로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고, 스스로 죄를 이길 수 있는 존재라고. 그러나 그런 가르침을 바울은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리고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서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렇기에 바울은 한사코 그런 히브리성경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히브리성경의 가르침과 그리스도 사이에서 양자택일하라고 협박에 가까운 선포를 한다.”(95~96쪽).

“(바울의 구약 인용을 비판하며)바울이 옳다면, 그는 왜 굳이 히브리성경을 왜곡해야만 했을까? 왜 그는 없는 내용까지 만드는 무리수를 두어야 했을까? 하나님은 토라의 점 하나도 바꾸면 안된다고 분명히 경고했는데, 점 정도가 아니라 이사야서 구절의 내용을 아예 통째로 바꾼 사람이 누구인가? ‘내가 너희에게 명령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고 내가 너희에게 내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라’(신명기 4:2).

그러나 바울이 어떤 사람인가? 예수의 직계 제자들에게까지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다.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꾸짖으며 가르친 사람이다. 그런 바울에게 토라, 즉 지금 기독교에서 말하는 구약성경의 점 하나도 더하거나 빼면 안된다는 하나님의 경고는 별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필요하면 주어도 바꾸고 없는 문장을 만들어 넣기도 했다. ‘나의 복음을 전파하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가 하지 못할 일은 없었던 것처럼 보인다.”(96쪽).


믿음이 가진 이기심이라는 속성 외에도 자신은 거짓말을 해도 다 이유가 있고, 거짓말조차도 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스스로 합리화하는 놀라운 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 사고방식의 원조를 바울로 보아야 할까? 우리는 이미 그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히브리성경을 어떻게 왜곡하는지를 보았다.”(103쪽).


“히브리성경의 하나님은 순종의 대상이었지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두를 단숨에 바꾸었다. 결코 순종할 수 없는, 희망없는 인간에게 남은 희망은 믿음뿐이라고 했다”(109쪽).


“그리스신화에 종종 등장하는, 하늘의 신이 땅에 내려와 인간을 범하고 애를 낳는 장면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은 본질상 그리스신화와 별다를 것 없는, 신약 성경 속 동정녀 수태에서는 조금의 거부감이나 이질감도 느끼지 않는다. 아니, 감동(은혜)까지 받는다. 어려서부터 너무도 자연스럽게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동정녀 수태도 신이 일방적으로 인간을 범한 사건이다. 마리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임신했고, 나중에 그 사실을 통보받았을 뿐이다.”(117쪽).


“기독교에서 예수는 엄연한 ‘신’이고 당연히 유대인에게는 이름도 부르면 안되는 ‘다른 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독교의 다신 개념은 예수에서 끝나지 않는다. 한걸음 더 나아가 기독교는 삼위일체라는, 히브리 성경에서는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유대인의 눈에 삼위일체는 이집트 신화의 삼인조 신오시리스’ ‘이시스그리고 호루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아니 삼위일체는 유일신 하나님에 이방의 잡신 개념을 섞은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죄악이다.”(119쪽).


“삼위일체를 자세히 살펴보기 전에 먼저 누군가가 완전한 인간이자 동시에 완전한 신이라는 기독교의 주장을 살펴보자. 바로 ‘성육신’교리다. 삼위일체와 성육신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그럼 성육신이 무슨 의미일까?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내가 완전한 남자이자 동시에 완전한 여자일 수 있을까? ‘동시에남자이면서 여자인 완남완녀는 불가능하다. 남자와 여자를 정의하는 속성이 상호 배타적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둘 중 하나가 되는 순간, 다른 하나는 사라지고 만다.”(119~120쪽).


예수에게도 불확실성이 주는 불안이 있었을까? 그렇다면 그는 완전한 인간이다. 그러나 결코 신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불안함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존재, 인간의 모든 결함이나 한계가 제거된 완전한 존재가 신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신의 거리는 여자와 남자의 간격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어느 한쪽이 되는 순간, 다른 하나의 속성은 흔적도없이 사라지기 마련이다. 따라서 예수는 동시에 신이고 인간일 수 없다.”(122쪽).


“사실 엄밀하게 말해 예수가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고 죽었다는 사실은 그가 100퍼센트 인간이지 절대 신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신은 죽지 않는다. 신이라는 단어의 개념 안에는 ‘불멸’이라는 뜻도 담겨 있기 때문이다.”(123쪽).


“삼위일체가 무엇인지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어차피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궤변이기 때문이다. 꼭짓점이 세 개 달린 원을 그리라는 말과 똑같기 때문이다.”(125쪽).


바울이 예수를 신으로 격상한 동기는 자명하다. 신이 되지 않고서는 로마에서 다른 종교와 경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은 빌립보서 2장에 아마도 당시 초대교회에서 널리 불렸던 찬송가 가사를 삽입했다. 이른바 ‘예수 찬가’다. 거기에는 하나님이 예수를 특별히 ‘올려서’ ‘신급 존재’로 만들었다는 묘사가 있다.”(126쪽).


니케아 회의는 오늘날 한기총 이사회의 회의 장면과 비슷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 교단 총무가 총까지 들고나와 겁박하는 한국과는 차마 비교할 수 없겠지만, 그래도 니케아 회의가 정치적 모임이었다는 점에서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늘날 한기총 이사회에서 나온 결정을 성령의 역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니케아 회의의 결정과 향후 니케아신경을 바탕으로 확정된 많은 교리는 그후 2,000년간 서구 사회를 지배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37쪽).


“히브리성경에서는 도통 찾아볼수 없는 새로운 개념이 기독교에는 매우 많다. 인간의 몸을 입은 하나님, 동시에 하나님이자 인간인 예수 그리고 삼위일체라는, 지금이라면 특허를 신청해도 될만한 놀라운 생각들로 가득하다. 단순하고 명쾌했던 유대교의 유일신 교리에 그리스의 이원론과 다신론이 스며들면서, 언젠가부터 기독교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교리들로 채워지기 시작했다.”(148쪽).


맥락과 상관없이 원하는 단어가 하나라도 있으면 맥락을 무시하고 무작정 인용한 경우는 복음서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미 앞에서 살펴본 바대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히브리성경을 인용하면서 원문의 ‘주어’를 임의로 바꾸었다. 신명기 30장의 경우에는 아예 맥락과 전혀 상관업시 작위적으로 인용했다.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그건 히브리서 저자도 마찬가지였다.”(217쪽).


“(시편 40편을 히브리서 저자가 인용한 것을 두고:편집자주)나는 히브리서 저자가 착각한 게 아니라 창작했다고 생각한다. 달리 말하면 의도적 왜곡이다. 보면 볼수록, 자신의 신학을 전하기 위해서 히브리 성경의 원문을 바꾸는 그의 창작이 매우 자연스러워 보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8장 9절도 그의 창작력이 여실히 발휘된 구절이다.”(219쪽).


“(동정녀 탄생을 언급하며) 바울서신서에 의해 당시에 이미 ‘신급’으로 떠받들어지던 예수였지만, 적지 않은 라이벌이 있었다. 로마 제국에는 황제를 비롯해 반신반인이 득실거렸고, 이교도에는 초자연적인 탄생 비화를 가진 인물들로 넘쳤다. 예수가 그들과 차원이 다른 신급을 갖추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특별한 탄생비화가 필요했다.”(229쪽).


“거짓말은 또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신약성경에서 시작된 거짓말을 감추려고, 후대 번역자들은 또다른 거짓을 구약성경에 심었다. 그게 기독교의 역사다. 그들은 절대 지금과 같은 세상이 오리라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구나 성경을 앞에 놓고 여러 언어를 비교하는 세상이 오리라는 것을 차마 꿈구지 못했을 것이다.”(258쪽).


“(바리새인과 예수의 대화를 놓고 하는 말: 편집자주)히브리성경에 능통한 유대인이 이 본문 앞에서 ‘정말로’ 말문이 막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예수와 바리새파 사이의 가장 신학적인 이 대화는 정작 가장 일어났을 리 없는 창작물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떻게든 메시아가 신적 존재라는 구절을 찾아내고 싶었던 복음서 저자의 순수 창작물이거나, 아니면 누군가에 의해 이미창작되어 떠도는 전승을 그들이 기록했거나 둘중 하나다.”(265쪽).


“역사를 볼 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지난 2,000년간 유대민족이 당한 고통은 절대 그들의 잘못 때문이 아니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신약성경이 뿌린 씨앗 때문이다. 즉 기독교 때문이다.”(331쪽).


“사실상 기독교를 창시한 인물인 바울을 연구한 책은 하나같이 어렵다. 복잡하기 그지 없다. 정말로 바울이 이런 ‘해석’을 염두에 두고 이렇게 썼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 정도다. 왜 그럴까? 예수와 달라도 너무나 다른 바울의 사상이 예수와 똑같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렵고 복잡한 이유는 의외로 단순명료하다. 말이 안되는 것을 말이 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은 히브리성경의 명확한 말씀을 아예 이해불가의 교리로 바꾸어 놓았다. 이해할 수 없는 교리는 기독교인 속에 멈추지 않는 내적 균열을 일으킨다. 이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모순을 품고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모순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버리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문제가 끊이지 않는다.”(339쪽~340쪽).


궤변과 왜곡으로 가득찬 신약성경이 기독교의 경전으로 지난 2,000년을 버텨온 것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히브리성경과 수많은 지점에서 철저하게 모순됨에도, 신약성경이 아직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기적이다.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박사가 수만, 아니 수십만 명이 넘는데도, 아직까지 히브리성경과 신약성경을 함께 묶어서 ‘성경’이라고 부르는 것은 기적이다.”(341쪽).


“이 책의 전체 내용을 이렇게 세 줄로 요약할 수 있다. 히브리성경은 진실이지만 신약성경은 가짜일 수 있다 히브리성경이 가짜라면 신약성경은 반드시 가짜다 그러므로 신약성경은 진실인데 히브리성경이 가짜일 수는 없다. ···어떤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일까? 히브리성경의 하나님일까 아니면 기독교의 하나님일까? 다시 말하지만 그 두 하나님은 결코 같은 하나님이 아니다.”(34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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