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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합동측, 능동순종 헌의안 신학부로··· ‘팀킬’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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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합동측, 능동순종 헌의안 신학부로··· ‘팀킬’ 막는다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22.11.0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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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신학자들이 주장한 신학, 이단 문제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의지 반영

능동순종에 대한 ‘이단성 문제제기’가 한창이다. 능동순종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율법을 완전히 순종하시고(능동순종) 온전하고 흠없는 제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수동순종)는 주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이를 이단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능동순종 교리가 십자가로만 얻는 구원을 부정하는 율법주의 신앙이라고 비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의로우신 분인데 어떻게 율법을 지켜서 의를 획득하셨다고 말하느냐고 반문한다(서철원, 바른믿음, 2019년 4월 17일 기사, http://www.good-faith.net/news/articleView.html?idxno=1489).

이에 공감하는 예장 합동측 일부 목회자들이 능동순종의 이단성을 연구해 달라고 총회에 헌의했다. 통상 ‘이단성 조사’를 해달라는 헌의안은 이단사이비조사대책연구위원회(이대위)로 위임된다. 그러나 합동 총회는 능동순종과 관련한 헌의안을 이대위가 아닌 신학부로 넘겼다(기독신문, 2022년 9월 23일자 기사, http://www.kidok.com/news/articleView.html?idxno=216923).  능동순종에 대한 헌의안을 이단이냐, 아니냐가 아니라 신학적 토론과 연구의 대상으로 보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으로 해석된다.

바른믿음
능동순종 이단 문제제기에 앞장서는 바른믿음

합동측의 결정은 매우 지혜로웠다. 신학부 연구를 통해 능동순종에 사변적이고 무리한 해석이 있다면 오늘날 가다듬어가자는 자세는 환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를 이단성이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으로 접근하면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의 능동순종은 갑작스레 근래 들어 등장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개혁신학자들 사이에서 수백년에 걸쳐 받아들여 온, 그것도 ‘칭의’라는 항목에서 매우 중요하게 다뤄온 주제라는 점에서이다. 다른 교단도 아닌 합동측이 이 주제를 이단성 있느냐, 없느냐의 관점으로 접근하게 되면 지금까지 합동측에서 존경받아온 개혁신학자들을 스스로 이단시하는 심각한 오류와 모순을 갖게 된다.

결국 확대해석하면 합동측의 신학이 이단적 교리 위에 세워졌다는 황당한 자기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능동순종에 대한 접근은 이단이냐, 아니냐가 돼서는 결코 안되고 신학적으로 유의해서 살펴보는 겸허한 태도가 전제돼야 한다. 신학에 대한 겸허함과 존중이 없는 능동순종 논의는 시작부터 어긋난 것이다.

칼뱅도 기독교강요에서 분명히 능동순종으로 볼 수 있는 개념을 설명했다. 칼뱅이 능동순종이란 단어를 쓰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칼뱅은 기독교강요에서 그리스도의 순종을 세분화해서 설명한다. 그의 전개를 따라가다보면 능동순종의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는 의미이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겠지만 칼뱅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십자가에 국한하지 않고 전생애에 걸쳐 이뤄진 것이라 정의한다. 이를 전제로 칼뱅이 그리스도께서 아담과 같은 인성을 취하셔서 아버지께 순종했다고 표현할 때 이 또한 전생애적 순종을 의미함이 당연하다. 칼뱅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순종은 아담과 같은 인성을 취해서 행하신 순종이었고 생활 전체에 대한 복종이었으며 십자가의 고난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전인생 자체가 십자가와 다를바 없는 순종의 삶이었다. 따라서 능동순종은 칼뱅과 무관하게 뚝 떨어져 발생한 것이 아니다. 이는 기독교강요를 자세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다수가 인정하는 바이다(하단 자료 참고).

더욱 중요한 것은 이단성 헌의안이 올라온 예장 합동측 총회 헌법이 능동순종 개념을 포함한다는 점이다. 이는 합동 총회가 매우 심각하게 고민해야 함을 시사한다. 총회 헌법 신조 7항을 보자. 다음과 같이 명기해 놓았다.

합동측 총회헌법 신조 7항에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합동측 총회헌법 신조 7항에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라는 항목이 눈에 띈다. 

“그 영원한 아들이 참사람이 되사 그 후로 한 위에 특수한 두 성품이 있어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라. 성령의 권능으로 잉태하사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 났으되 오직 죄는 없는 자시라. 죄인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법에 완전히 복종하시고 몸을 드려 참되고 온전한 제물이 되사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하게 하시며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려고 십자가(十字架)에 못박혀 죽으시고 죽은 자 가운데서 3일 만에 부활하사 하나님 우편에 승좌하시고 그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시다가 저리로서 죽은 자를 살리시고 세상을 심판하려 재림하신다”(예장 합동 총회 홈페이지, http://gapck.org/sub_06/sub02_01.asp).

역시 총회 장로교리의 표준 문답 대요리문답 70항 “의롭다 칭하심(칭의)이란 무엇인가”에서 “오로지 그리스도의 온전한 순종과 충분한 만족이 하나님에 의해 그들에게 전가되고 또한 믿음으로만 받아 드린바 됨으로 인한 것이다.”라고 기록했다.

이뿐 아니라 합동측 총회 신도게요서(信徒揭要書 믿을 신, 무리 도, 높이들 게, 요긴할 요, 글 서), 즉 합동측 총회 소속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들이 알아야 할 중요한 요점을 기록한 문서 11장 칭의에 관하여 1항에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그들에게 전가시키고”, 3항 “그리스도는 그의 순종과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이와 같이 의롭다 함을 얻은 모든 자들의 빚을 다 갚으셔서”, “그의 순종과 만족이 그들 대신으로 수납되었는데”라고 표현한다.

이처럼 합동측 헌법과 대요리문답과 신도게요서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만족을 세분화하고 무엇에 대한 순종이냐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법”에 대한 순종이었다고 써놓았다. 합동측 헌법에도 포함한 것이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 개념임을 부정할 수가 없다.

이는 칼뱅의 개혁주의를 표방하는 침례교인들도 다르지 않다. 1689년 발표한 제2차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는 제 11장 칭의 항목, 1항에서 "모든 율법에 대한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이르는 수동적 순종을 그들의 전적이고 유일한 의로 전가함으로써 그들을 의롭다 칭하시는 것이다"고 밝혔다(피영민, 『1689 런던침례교신앙고백서해설』, (서울:요단, 2018), 167.p). 

개혁주의 신앙의 맥을 잇는 다수의 존경받는 신학자들이 능동순종을 강조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헤르만 바빙크, 루이스 벌코프, 안토니 후크마, 게할더스 보스뿐 아니라 합동측 조직신학의 원조 박형룡 등이 대표적이다.

따라서 개혁신학 안에 용인해 온 개념을 신학적 논의나 연구하는 자세로서 접근하는 게 아니라 ‘성경적 근거가 없다’, ‘사변의 산물이다’, ‘십자가를 부정하는 이단’, ‘이단교리’, ‘사이비 개혁주의’, ‘요설’, ‘사악한 이단사상’이라며 온갖 모욕적 언사로 정죄부터 하는 방식의 접근은 결코 건강한 자세가 아니다.

고신측 신학연구위원회도 2022년 9월에 열린 71회 총회에서 능동순종에 대한 입장을 발표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동 순종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입장에 대한 요청의 건”에 대해 “능동적 순종은 그리스도의 순종을 훨씬 더 풍성하게 이해하게 하고, 칭의에 대한 보다 강력한 확신을 준다는 점에서 매우 유익한 교리이다.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 문제를 명시적으로 정리하지 않았지만 전체적인 문맥에서 보았을 때 능동적 순종은 신앙고백에 암시적으로 포함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또한 신실한 개혁파 신학자들이 가르쳤으며 총회의 신학교에서도 가르친 교훈이기 때문에 계속 소중하게 지켜나가야 한다”고 발표했다.

예장 합동도 이 중요한 신학적 이슈를 이대위가 아닌 신학부로 넘기며 신중하고 조심스럽게 다루겠다는 의지를 보여줬다. 이제라도 능동순종에 대한 이단성 여부를 묻는 헌의안이 합동측 신학부로 넘어갔다고 하니 다행이다. 만일 이단성 여부를 논하자는 취지로 ‘이대위’로 넘겼다면 이는 합동 총회 자체에 대한 ‘팀킬’이 될 수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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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기독교강요

존 칼빈, 『기독교강요2』,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0), 390,p.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에 이르기 위하여 고려해야 할 둘째 사항은 자기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사람은 순종을 묘약으로 삼아 그것에 맞서야 하며, 하나님의 판결을 이행해야 하며, 죄에 따르는 형벌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아담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복종하기 위해 참사람으로 나타나셨고, 아담의 인격을 입으셨고, 그의 이름을 취하셨다. 이는 우리의 육체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위한 동일한 육체 가운데서 지불하시고자 함이었다(2.12.3).

존 칼빈, 『기독교강요2』, 문병호 역, (서울: 생명의말씀사, 2020), 462,p.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묻기를, 어떻게 그리스도가 죄를 물리친 후에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반목을 걷어 내셨는지, 그리고 어떻게 의를 획득하셔서 하나님을 우리에게 호의를 베푸시고 자비로우신 분이 되게 하셨느냐고 한다. 이에 대해 우리는 그가 자신의 순종의 역정을 통해 우리를 이하여 이 일을 성취하셨다는 일반적인 대답을 할 수 있다. 이것은 바울의 증언에 의해서 확정된다. "한 사람의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롬 5:19). 과연 다른 곳에서 사도는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출해 내는 은총의 원인이 그리스도의 전체 삶에 미치는 것으로 여긴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려 하심이라"(갈 4:4-5). 이와 마찬가지로 또한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는 자기가 순종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하심으로써 의의 한 부분을 성취하셨다고 선포하셨다(마 3:15). 요컨대 종의 신분을 입으신 때로부터 그리스도는 우리를 구속하시려고 해방의 값을 치르기 시작하셨다(2.16.5).

『기독교강요3』, 296.p. 실상 그는 이 땅 가운데 머물고 계신 동안에 끊임없는 십자가의 훈련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삶 전체가 다름 아닌 끊임없는 십자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도는 “그가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라는 말씀으로 그 이유를 든다(3.8.1).

『기독교강요4』, 588.p. 진정 그리스도는 자기 안에서 택함 받은 모든 연령에 속한 자들을 구별없이 거룩하게 하시려고 갓난 아이 때부터 거룩하게 되셨다. 그는 우리가 육체 가운데서 저지른 불순종의 죄과를 도말하시려고 육체 그 자체를 입으셨으며, 그 육체 가운데서 우리를 위하여, 우리 대신에, 완전한 순종을 이루셨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심으로써 그 육체를 취하셨다. 그리고 그 육체 가운데서 성령의 거룩함을 충만히 부음 받으셨다. 그리하여 그 거룩함을 우리에게 부어주시고자 하셨다(4.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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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육사 2022-11-08 20:57:40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에 ‘그리스도께서 능동(율법준수) 순종으로 얻으신 의義와 그 의義의 전가 교리’가 명명백백明明白白하게 적혀 있습니다. {기독교 강요 제2권} [17장] <5항> 일부분을 아래 세 칸에 옮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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