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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인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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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2천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인간론
  • 교회와신앙
  • 승인 1994.0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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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열 교수(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총신대 조직신학교수로 있다)

한국교회의 이단문제는 그 심각성이 이미 공지된 사실이다. 그러나 심각성에 비해 대처와 처방이 미흡하고 적절하지 못했다. 이단 문제에 대한 진단과 처방은 다각적인 방법을 통해 분석하고 또한 대처해야 할 시급한 과제이다.

이단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는 교리적인 문제의 접근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올바른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의 이단 사상에 대한 현실 인식을 위해서는 과거에 어떤 교리에, 어떤 이단들이 있었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본지는 이단이 발생할 수 있는 전 교리를 고찰, 오늘날의 이단 사상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제시하고자 '기독교 2처년 교리 속에 나타난 이단 사상'을 기획했다.

필자마다의 다소간의 학문적 차이점이 있고, 전문적인 용어 때문에 독자들에게 이해가 어려운 부분이 있더라도 집중해서 읽어 주었으면 하는 바이다. <편집자 주>

 


나는 왜 죄인인가?
죄의 전이교리(transmission of sin)에 대하여 역사상에 나타난 여러 견해들

들어가는 말

성서가 가르쳐주고 있는 인간에 대한 설명들 중에 중요한 내용으로서 '죄인된 인간'의 모습을 빼 놓을 수 없다. 그런데 인간이 죄인들이라는 얘기는 기독교인들만의 얘기가 아니며, 다른 종교인들도 그리고 또한 하나님을 거부하는 불신자들의 입으로부터도 흘러나오는 결론이다.

로마서 2장 14절부터 15절의 말씀과 같이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양심이 비록 하나님의 율법과 같이 분명하고 구체적으로는 아닐지라도 그들의 행위와 마음의 생각을 송사하게 되므로 자신의 죄인됨을 스스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성서와 인간의 경험은 공통적으로 인간사에 있어서 그 죄의 보편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불신자들도 죄인됨을 인정하는 일에 있어서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그런데 '죄인된 인간'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 중에서 불신자들이 수용하기 어려운 다른 하나의 설명은 바로 '원죄'에 대한 내용이다. 즉 우리가 우리들의 못된 행위들을 생각해 보고서, 그것 때문에 죄인이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이미 죄인이라는 뜻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이 저지른 실수 때문에 오늘 나는 죄인이라고 하나님에게 간주되고 있다는 말이다.

현대인들은 질문한다. 하나님께서 과연 공정하신 하나님이시라면 그런 식으로 우리를 취급하실 수가 있겠는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수천년(혹은 수억년)전의 한 아저씨(?)가 저지른 실수 때문에 나를 죄인이라고 뒤집어씌우신다면 올바른 처사일 수 있는가?

역사상의 많은 신학자들이 이 문제를 놓고 씨름해 왔다. 그들 나름대로의 신학적 원리를 적용하여 설명하며, 납득할 만한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행정과 사역의 신비를 우리의 이성의 틀에 납득되도록 짜 맞추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그분의 계시의 말씀인 성서가 그러한 하나님의 행정원리에 대해서 어떻게 서술하고 있는지를 그 성서가 가르치고 있는 바대로 이해하여, 그 말씀의 권위 아래서 신앙으로 그 내용을 수용하는 것이 이 문제를 대하는 바른 자세인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성서의 설명을 제시된 바대로 이해하려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우리는 먼저 원조의 문제에 대해서 취해진 역사 속에서의 여러 견해들을 두 그룹으로 분류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아담의 죄가 오늘날 인간들의 죄인됨의 사실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이 아니라고 보았던 이들의 입장을 살펴볼 것이며, 그 후에 그 연관성을 직접적으로 관련 짓는 입장들에 대해서 고찰해 보면서, 성서의 가르침을 바르게 정립해 나갈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해 보려한다.

직접적 연관성을 거부하는 견해들

펠라기우스(Pelagius)의 견해
오늘 우리의 죄인됨이 에덴동산에서의 아담의 행위와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사실에 대해서 강하게 거부했던 대표적인 인물로 펠라기우스(383~410)를 들 수 있다. 그는 영국 출신의 수도사였으며, 로마에서 인기 있는 설교가였다. 그러나 그가 이해한 인간의 모습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그에 관한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은 그는 흠 없는 성격의 소유자로서 엄격한 영적 생활과 도덕 생활을 강조하며 추구했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의 일생에 논쟁의 상대자였던 어거스틴이 인간 본성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평가하며 죄성을 강조하는 것은 거룩한 삶을 살려는 인간의 모든 동기를 제거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이러한 맥락에서 아담의 범죄란 단지 자기 자신에게만 그 영향을 끼쳤으며, 오늘의 인간들은 범죄 전의 아담과 같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스스로 도덕적, 영적 생활을 영위해 갈 수 있는 존재로 태어난다고 주장한 것이다.

원조를 설명하는 주요 성구인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내용에 대해서는 언급하기를 아담 이후의 인간에게 죄성이라는 것은 없으며, 그들은 단지 죄의 전례(example)를 따라 죄를 범할 뿐이다라고 했다. 즉 12절 하반부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라고 할 때에 그 '죄를 짓는다'의 의미를 현재적으로 오늘의 모든 사람들이 범하는 개인적인 죄들을 말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이다. 즉 오늘 우리들에게 죄와 사망이 임하는 것은 우리들 스스로의 죄 때문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아담의 범죄는 오늘의 인간들에게 어떠한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없고 단지 죄의 선례를 보였다는 의미에서만 그 연관성을 보는 것이다. 오늘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아담과 그 이후의 인간들의 나쁜 습성들을 본받아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지, 필연적으로 죄를 짓게 되는(non posse non peccare) 원죄로 인한 부패한 죄성을 가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펠라기우스의 견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제점들을 지적해 볼 수 있다.

먼저 12절 하반절의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의 내용에서 언급되는(헤마르톤: '죄를 범하다'의 뜻)의 단어는 과거의 한 행위를 언급하는 데 사용되는 단순부정과거 형태라는 것이다. 펠라기우스의 견해와 조화되려면 현재 시제인(히마르타누신)을 사용하여 그 죄 짓는 행위가 계속적으로 진행되는 의미의 시제 형태로 대체시켜야 하는 부자연스러움이 발생되기 때문이다.

또한 죄의 전례가 있다고 해서 그 후의 사람들이 반드시 죄를 따르게 되는 것이라고 볼 필요는 없는 것이다. 불의한 행동을 보고 오히려 경각심을 느끼고 더욱 주의하게 되는 경우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근본적으로 중요한 문제점은 로마서 5장 12절부터 21절에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대비(평행구조)의 기본 내용에 조화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문제는 후에 직접적 연관성을 수용하는 입장들을 다루게 될 부분에서 그와 관련하여 설명되어질 것이다.
 
사무르(Samur)학파
아담의 범죄와 오늘 우리의 죄인됨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는 또 다른 입장은 간접전가를 주장하는 이론이다. 이 이론은 그 연관성을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펠라기우스와는 달리 어떠한 형태로든지 관련 짓기는 하되, (어떤 납득될 만한?)다른 근거 위에서 그 연관성을 설명하려는 시도이다. 왜냐하면 이 간접전가 이론도 하나님께서 스스로 죄를 짓지도 않은 이들에게 먼 옛날 다른 사람의 실수를 근거로 하여 죄책을 전가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점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 인간들을 죄인들로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아담의 범죄행위 이외의 내용 속에서 설명하려고 한 것이다. 그 근거란 바로 아담의 후손들이 자연적인 출생과정을 통해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게 된 부패한 성품이라고 보고 있다. 즉 아담의 지은 죄 때문에 오늘날 우리도 죄인들이 되게 되었으나, 무조건 아담의 범죄 그 자체에 근거해서 바로 우리를 죄인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생겨난 부패성을 우리도 함께 공유하게 되었으므로, 우리의 부패한 성품에 근거해서 우리의 죄책을 말하게 되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러한 견해는 프랑스의 사무르(Samur)신학교의 플라케우스(Josua Placaeus: 1595~1655)에 의해서 주장되어졌으며, 그 후에도 유럽에서는 캠페기우스 버트린거, 헤르만 베네마, 스태퍼(Campegius Vitringa, Hermann Venema J.F. Stapfer)와 같은 이들에 의해서 옹호되었고, 미국에서는 18세기의 뉴잉글랜드 신학자들과 19세기의 신학파(New School)장로교에서 채택되어졌다. 그들 모두가 언제나 동일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아담의 범죄와 우리의 죄인됨의 사실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은 부류에 속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18세기 뉴일글랜드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홉킨스(Samuel Hopkins)의 입장을 보면 그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성품 그 자체를 우리의 죄책의 근거라고 보기보다는(위에서 설명한 전형적인 간접전가 이론), 그것은 오늘의 인간들이 도덕적 인격자로서 활동하게 될 때에, 그들이 반드시 죄를 짓는 행위를 시작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보장하고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아담의 후손들의 죄성이 아담의 죄와 연관이 있기는 하나, 오늘의 인간들이 실제로 죄를 범하게 되기까지 그들을 죄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담의 범죄에 동참하는 행위를 함으로써만이 그들의 죄책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홉킨스는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 성품에 대해서도 말하기는 하였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죄책의 근거는 그 부패한 성품으로부터 발생되는 범죄행위에서만 찾아지게 되는 것이다.

홉킨스 이외에도 아담과 오늘의 인류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거부하는 이들이 더 있으나 그들의 간접전가 이론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몇가지의 문제점들만을 지적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기로 하자.

이 이론은 오늘날 인간의 죄인됨의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아담의 부패한 성품을 물려받게 된 아담 후손들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으나(전형적인 간접전가 이론) 사실은 그 설명도 그렇게 납득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담의 부패가 그의 후손들에게 전이되어야 하는 근본적인 원리나 이유를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홉킨스와 같이, 아담 후손의 부패성을 말하되, 그 부패성 자체에서부터가 아니라, 그것으로 말미암은 실제적인 범죄 행위에 근거하여 말하게 되면, 위에서 펠라기우스 입장의 문제를 설명할 때에 앞에서 제기했던 12절의 '헤마르톤'의 용법에 관한 문제가 공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문제들이 있으나 가장 근본적인 지적은 펠라기우스의 경우에서와 같이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제시하고 잇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조의 기본 내용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거기서 바울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을 아담의 한 범죄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한 문제도 마지막 항목에서 다시 밝혀지게 될 것이다.

직접적인 연관성을 수용하는 견해들
여기에서 소개되는 입장은 근본적으로 성서의 가르침을 그 액면 그대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견해들이다. 피상적으로 보아 인간의 입장에서 납득되기 어려울 수도 있으나, 성서의 설명, 특히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서의 바울의 가르침을 바로 인간을 취급하시는 하나님의 행정원리에 대한 명확한 진수인 것으로 보는 견해들인 것이다.

특히 로마서 5장 12절의 '죄를 범했다'에 대한 해석과 단순부정과거 형태로서 분명히 과거의 한 범죄행위, 즉 아담의 범죄와 관련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을 말하고 있다. 즉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본문에서 설명된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순수하고도 진지하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의 죄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 사이의 직접적 연관성을 설명하는 방식에 있어서는 두 가지 주장들이 제시되고 있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실제설
어거스틴(354~430)의 인간에 대한 이해는 -펠라기우스의 그것이 펠라기우스의 성품과 삶의 경험에 영향을 입었음을 배제할 수 없듯이- 그의 생애의 경험과 연관되어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 그는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즉, 하나님의 은혜로!)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처럼 보여진다. 따라서 펠라기우스가 인간의 자연적 도덕 능력을 강조한 반면에, 어거스틴은 인간의 부패와 타락성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아담의 죄와 오늘 인간들의 죄인됨의 연관성에 대해서, 어거스틴은 터툴리안(Tertullian)의 영혼윤회설(Traducianism)적인 이해 위에서 설명해 나갔다. 즉 인간이란 아담 안에서 하나의 총체적 인성으로 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아담이 범죄했을 때에 우리 모든 인류는 사실상 아담 안에 함께 존재했었던 것이며, 아담과 함께 실제로 우리가 범죄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범하지도 않은 죄에 대해서 우리를 나무라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아담 안에서 우리가 실제로 저지른 과오에 대해서 죄책을 지우시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대한 중요한 성경적 설명으로, 히브리서 7장 9절에서 10절에 나오는 레위의 존재에 대한 진술을 사용한다.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을 만나 십일조를 바쳤으나, 레위가 바친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레위가 그때에도 아브라함의 허리에 존재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으로 여길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의 실제설은 하나님의 공정성을 변호하는 데 있어서 변증적으로 중요한 의의를 지니며, 원죄를 밝히 설명해 준다는 점에서 위에서 설명한 펠라기우스나 사무르학파의 이해보다는 성경적 가르침을 바르게 제시해 주고 있으나, 몇 가지 지적되어야 할 부분이 있다.

아담 안에 인류의 보편적 인성이 존재해 있을 때 아담의 범죄한 사실에 근거하여 설명하려 한다면, 왜 아담의 죄악된 처음 행위만을 말하고, 그 이후에 발생되었을 다른 죄에 대해서는 후손들이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또한 같은 부분에 대해서 제기될 수 있는 것은 하와의 문제이다. 왜냐하면 아담이 범죄할 때, 하와는 아담으로부터 이미 분리되어진 별개의 개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와는 아담의 범죄 행위에 대한 죄책 전가의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위에서 제시된 다른 이론들과 같이 이 이론도 로마서 5장 12절 이하에서 사도 바울이 설명하고 있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평행구조의 기본원리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점도 다음 항목에서 다시 취급되어질 것이다.

언약적 대표설(Federalism)
이 입장도 아담의 범죄행위와 모든 우리들의 죄인됨의 사실 사이에 직접적인 연관성을 말한다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실제설과 같으나, 그 연관성의 원리에 대해 달리 설명한다. 그 다른 원리란 아담을 모든 인류의 혈통적 대표(조상)로 볼 뿐만 아니라 언약적 대표(머리)로 본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행정원리란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나머지의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서 범죄한 것으로 보셨으며, 그의 범죄행위의 결과는 그의 후손의 행위로 간주되었고 그렇게 하여 모두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언약적 대표설은 바빙크, 마첸, 머레이, 벌코프(H.Bavink, G.Machen, J.Murray, L.Berkhof) 등과 같은 위대한 개혁주의 신학자들에 의해서 주장되어졌으며 관련성구인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내용을 가장 적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우선 위에서 언급했던 12절의 '죄를 지었다'에 대한 해석은 어거스틴의 실제설과 같이 본문의 단순부정과거 형태를 그대로 자연스럽게 따를 수 있다는 점을 들 수 있으나, 좀더 근본적으로는 로마서 5장 12절에서 21절에 나오는 아담과 그리스도의 평행구조의 기본원리에 가장 부합되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 5장 12절 이하의 말씀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두 사람의 대표자를 통해서 행정하셨는데 서로 평행적인 구조원리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즉 에덴동산에서의 처음 창조 때의 한 사람(아담)은 (행위)언약의 대표로서 모든 인류를 대표해서 행동했던 것이며, 그와 같이 재창조(새 창조)때의 한 사람(예수님)은 (은혜)언약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표하여 구속사역의 의를 이루셨다는 평행구조를 말하고 있다(롬5:15~19).

그러므로 오늘 성도들이 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게되는 것은 바로 우리의 대표자 되신 예수님의 의의 한 행동 때문인 것처럼(18절), 아담의 후손들이 모두 죄인되는 것은 그들의 대표로서 범죄한 아담의 한 범죄 때문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의 평행구조에 펠라기우스의 이론을 적용시켜 보면 아담 후손의 죄인됨은 그들이 아담과 같이 스스로의 행위로 범죄했기 때문인 것처럼, 오늘 성도들의 의인됨도 그들이 예수님과 같이 스스로의 의의 행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해야 하므로 자력주의적(autosoterism) 종교로 전락하게 되는 문제를 낳게 되며, 간접전가 이론과 어거스틴의 실제설도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적용시켜 보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의 우리의 구원을 부자연스럽게 설명하게 되므로, 바울의 본문 내용에 부합될 수 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맺는 말

서두에서도 언급했듯이, 우리의 목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를 밝히고, 그에 따라 우리의 사고와 해석과 행위를 이끌어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의 기록을 통하여 밝혀진 사실은 아담 한 사람의 한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죄인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만 듣게 되면 불만이 생겨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바울의 본문은 거기서 멈추고 있지 않다. 본문을 통하여 궁극적으로 바울이 말하려는 점은 죄인된 우리들이 한 사람 예수그리스도의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생명에 이르게 되었다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의 복임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하나님의 놀라운 행정원리의 오묘함의 사실을 선포하는 본문의 선언 앞에서 우리는 또한 겸손히 그리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그 사람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월간 <교회와신앙> 1994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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