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인생이 그 정도밖에 안 남은 것처럼 열정적으로 살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문 권사는 지금까지 교회의 권사요 의사로서 살아온 열정 그대로를 황혼기에 쏟아 부어 마지막을 아름답게 장식하기 위해 뛰어다니고 있다.
문 권사는 소망교회를 출석하며 몸이 아파 입원을 하는 등 부득이한 일을 제외하고는 20여 년 동안 금요철야를 하며 신앙을 다져왔다. 교회가 건축 때문에 문을 닫았을 때는 교회 앞마당에 천막을 쳐 놓고 기도를 했을 정도다. 교회를 살리고 부흥시키는 것이 자신의 생명만큼이나 소중하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으로 인해 ‘교회 일’이라면 무리를 해서라도 앞장선 것이 사실이다. 교회에 필요한 자금이 있으면 없는 돈을 만들어 헌금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빚 독촉에 시달릴 때는 교회에 가서 그저 흐느껴 울기만 했다. 문 권사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순간순간을 이겨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회상한다. 그녀의 기도와 교회에 대한 열심은 시아버지의 유언 때문이기도 하다.
8형제의 장남인 남편과 결혼해 안 믿는 집 맏며느리로 들어갔다가 처음에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쫓겨나 혼자 집을 얻어 산 경험도 있다. 제약회사를 경영하던 시아버지는 “예수믿는 사람 우리 집에 왔다가는 제약회사 밑천 다 거덜난다”고 불안해 했다.
그렇게 핍박하며 평생을 예수 믿는다고 구박하던 시아버지는 결국 돌아가실 때 유언을 남겼다. 자신을 극진히 병간호를 하던 문 권사를 향해 “계속해서 기도 열심히 하라”며 유언을 남기고 별세한 것이다. 당시 장례식의 모든 과정을 교회에서 처리해 주는 것을 보고 완고하던 시어머니도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다.
문 권사는 시골의 미자립 교회를 세우는 데도 일익을 담당해 왔다. 미국와 한국에서 뜻이 맞는 권사들이 모여 1982년부터 밀알선교회를 조직해 지금까지 개척교회를 돕고 지원하며 자립을 돕는 역할을 해 왔다. 시골에 15개 교회를 개척하기도 했다. 개척한 교회에 무료진료를 나가기도 한다. 주일이면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미용사, 양재사, 의사 3명이 한 팀을 이뤄 시골 교회를 찾아갔다. 마을에 “파마하고 이발하실 분 오세요, 옷 수선할 사람 오세요”라고 선전하고 무료 진료를 병행하는 것이다. 낮에는 봉사하고 저녁 때는 신앙간증을 했다. 이렇게 주일을 보내고 집에 오면 자정이 되는 때도 있다.
그 원동력은 ‘하나님’ 때문이었다. 문 권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택하신 것을 깨달았다면 나도 하나님을 선택하고 그분을 우선순위로 하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다 보니 하나님이 자신을 위해 여러 가지 일을 주신다는 것이다.
요즘 그녀에게는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이미 40년 전의 일이지만 문 권사가 국립의료원에서 의사 생활을 할 때 영어를 가르쳤던 박사다. 그는 당시로서는 흔하지 않은 여 의인 문 권사에게 “이 나라의 여성계를 위해 일하라”고 말했다고 한다.
문 권사는 나라가 어려울 때 에스더 같은 여성들의 결집된 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수적인 종교계 또한 여자 성직자들이 남자들이 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여자 목회자들에게 힘과 용기를 실어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문 권사는 “성경공부를 하고 노인 복지를 하며 살고 싶었지만 하나님은 내게 다른 길을 인도하시는 것 같다”고 고백한다.
문 권사에게는 ‘여성 최초’라는 타이틀이 몇 개 있다. 여성최초 서울 강남구 의사회 회장, 서울시의원, 강남구 시의원 등의 경력이 그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문 권사는 정계에 투신해 뜻을 펼쳐보겠다는 마음이 있다. 문 권사는 “만일 하나님이 나를 국회로 보내신다면 에스더처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국회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말했다.
문 권사의 핸드폰에 전화를 하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유명한 복음성가가 울려 퍼진다. 그녀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향기를 전하는 인생으로 남겠다며 열심히 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