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편집 : 2024-04-20 10:51 (토)
"가정폭력, 용서 앞서 피해자 치유부터"
상태바
"가정폭력, 용서 앞서 피해자 치유부터"
  • 정윤석
  • 승인 2006.02.1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연세목회전문화세미나서 손운산 교수 주장

38세된 주부 서인영 씨(가명)는 결혼 생활 15년 동안 남편의 폭력에 계속 시달려왔다. 폭력을 행사하는 남편은 그럴 때마다 사과하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했다. 서 씨는 그런 남편을 용서하고 눈감아 주었지만 폭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이제 남편은 사과는커녕 서 씨를 향해 집을 나가라고 말하곤 한다.

그녀의 지금 마음 상태는 어떨까?

“그저 죽고 싶을 뿐입니다.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쓸모 없습니다. 죽으려고 했던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죽을 힘도 없고 그렇다고 살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냥 조용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누가 날 아무도 없는 곳으로 데려가 버렸으면 좋겠습니다.”

이혼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 할 줄 아는 기술도 없고 가계에 빚도 많았다. ‘이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요즘 그녀의 꿈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나타나곤 한다. 생전에 그녀의 어머니는 늘 아버지한테 매 맞고 붓고 멍들고 울고 미친 사람처럼 소리 지르곤 했다.

“그런 엄마를 보면서 ‘엄마처럼 안 살 거야’라고 수만 번 다짐도 했어요. 그러나 꿈에서 엄마를 붙들고 ‘엄마, 나도 엄마처럼 돼버렸어’라며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요즘은 울면서 집안에만 틀어 박혀 있습니다. 아무런 대책이 없습니다. 이젠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나 복수심도 없습니다. 그저 멍한 상태로 남편이 밥을 달라고 하면 밥을 주고,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집에 들어오지 않아도 이제 별로 신경도 쓰이지 않습니다.”

서인영 씨는 과연 남편을 용서해야 할까?

   ▲ 손운산 교수
2006년 2월 13일부터 2월 17일까지 진행한 연세목회전문화 세미나에서 첫째 날 강단에 선 손운산 교수(이화여대)가 ‘부부사이에서의 상처, 용서 그리고 이해’란 제목으로 강의하며 서 씨의 예를 들며 청중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강의를 듣는 대상은 대다수가 목회자·사모들이었다. 다양한 답변이 나오기 시작했다. “용서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넘어지고 쓰러지니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의 능력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용서가 불가능할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타인을 용서하지 않으면 오히려 자신이 죄책감에 시달립니다. 그러니 용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등.

여러 가지 답변이 나오자 손 교수는 청중들의 답변을 듣다가 “용서 이전에 선행돼야 할 것이 있다”고 제안했다.

“아무리 정신적·육체적 피해를 입은 사람도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으면 ‘과거’와 ‘가해자’에 매이게 됩니다. 용서를 해야 피해를 입은 사람도 비로소 자유로워집니다. 이 여성도 남편을 결국 용서해야 하겠지만 그러나 그 전에 먼저 이 여성의 치유가 필요합니다.”

길을 가다가 아무 일 없이 사람에게 얻어맞는 사고를 당했을 경우 일단 폭행당한 부위를 치료하고 회복시킨 다음 부당한 폭행에 대한 원한과 분노를 해결해야 하듯이 아내와 남편 사이에 존재하는 부부갈등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치료책의 첫 출발은 이야기하기다.

“피해자들은 이야기하지 못함 자체가 고통이에요. 이야기하기가 곧 치료가 되는 셈이죠. 피해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은 단지 억울해서 겪은 일을 알리고 싶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야기하기 자체가 고통을 견디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겪은 일을 이야기하지 못하고 가슴 속에 묻어두면 그것은 사슬처럼 피해자들을 속박합니다. 피해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 충격적 경험들을 조절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성합니다. 즉 피해자는 이야기하기를 통해 경험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자신이 선택한 이야기의 구조를 따라 그것들을 재배치합니다. 이 과정을 통해 피해자는 과거와 대면할 수 있는 능력을 회복하고 상처가 치료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죠.”

이야기하기를 통해 피해자들은 수치스런 자아에 대해 용납하는 경험을 하고 상처 입은 자아가 살아나기 시작한다. 이 과정에서 상처 입은 사람은 원한이 감소되는 것을 경험하고 보복대신 다른 대안을 찾고 그리고 상대에 대한 공감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치유의 과정 후 비로소 용서의 길이 열리게 된다. 그 전에 이뤄지는 용서는 잘못된 경우가 많다. 이는 종교뿐만 아니라 상담이나 교육을 통해 일어날 수도 있다. 건강하지 못한 형태의 용서의 종류에 대해 손 교수는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도덕적 정당성이 없이 이뤄지는 성급한 용서 △피해자가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 또는 교육의 결과로 나타나는 강요된 용서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모든 것을 덮고 모든 잘못을 자기에게 돌리는 병적 용서 △부도덕적인 행동을 부도덕하게 보지 않는 묵인적 용서 △여성들의 용서를 미덕으로 강조하는 문화 속에서 희생적으로 이뤄지는 거짓 용서가 있다고 지적한다.

치유의 과정과 단계를 밟지 않고 이뤄지는 용서는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손 교수는 이런 사람들은 성경공부나 말씀을 배워도 성장하지 못하고 제자리걸음을 하기 십상이라고 충고한다.

“교회에서 목사님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세상은 살만한 곳이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아무리 설교하고 표현해도 생활속에서 이미 자아가 심각하게 공격당하고 훼손된 사람들은 그것을 의심하고 부인해요. 신앙마저 왜곡되기도 하는데 이런 사람들에게는 제자훈련보다 상처의 치유가 우선해야 합니다.”

   ▲ 이혼목회세미나 참석자들
손 교수는 일부 교회에서 상담실이나 회복사역을 하는 것에 대해 대단히 바람직한 일이라고 평가했다. 손 교수는 이런 과정을 거친 후 ‘진정한 용서’가 이뤄진다고 말한다. 손 교수에 의하면 진정한 용서는 ‘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되는 것’이다.

“내담자의 자아를 돌보면서 치유의 과정을 밟고 건강한 자아로 성장시키고 주님의 사랑을 가슴 속에 새겨 넣다 보면 어느 순간 피해자라는 아내들의 마음에 남편에 대한 증오심이 없어진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비로소 용서가 발견됩니다. 이미 남편을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런 강요나 교육이 없어도 이뤄지는 것이죠.”

손 교수는 “한국교회가 사람들에게 긍정적 경험을 증대시키고 돌봐주며 많은 은총을 경험하도록 도와야 한다”며 “이런 경험을 한 사람들이 또 다른 상처받은 사람들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같이 아파하며 교감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이번 주간 진행한 연세목회전문화세미나는 ‘이혼위기와 목회 상담’이란 주제로 진행했다. 손 교수 외에 홍영택 교수(감리교신학대학교), 김영애 소장, 정석환 교수(연세대), 나희수 목사(지구촌교회) 등이 강사로 나서 200여 명의 청중을 대상으로 총 16회의 강의를 진행했다. 이중 홍영택 교수는 ‘외도와 이혼’이란 주제의 강연에서 “외도가 발생했을 때 우리는 정죄에 앞서 우선 현재의 위기에 결부돼 있는 요인들을 분석하여 대처할 필요가 있다”며 “효과적인 의사소통과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부부만의 대화의 시간, 성생활에 있어서의 구체적인 개선을 솔직하게 나눠야 한다”고 제안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