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음악의 ‘가왕’(歌王) 조용필 씨가 최근 소록도를 방문해 화제가 됐다. 그가 한센 환자들과 손을 맞잡고 ‘돌아와요 부산항에’, ‘창밖의 여자’ 등 자신의 히트곡을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고 한다. 국민가수가 한센환자와 손을 잡는다? 50년 전에는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었다.
기자(교회와신앙 www.amennews.com)가 어렸을 때다. 어른들은 산딸기를 따러 간다면 아이들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곤 했다. 문둥이가 산딸기 숲에 숨어 있다가 어린이들을 잡아서 간을 빼 먹는다는 것이었다. 미당 서정주가 ‘문둥이’라는 시를 지었을 정도였다.
“해와 하늘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온갖 편견과 선입견으로 각인돼 있으며 철저하게 차별받았던 사람들이 한센인들이었다.
이명남 선교사(65)는 한센인에 대한 편견과 냉대가 더욱 심각했던 50여년전 이미 한센병 환자였다.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뛰어 놀다가 넘어졌다. 팔꿈치와 무릎에 상처가 생겼다. 그곳을 통해 한센병균이 침투했다. 처음엔 단순한 상처로 알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몸에 이상한 현상이 생겼다. 머리카락이 빠졌다. 손톱도 온전치 못했다. 얼굴은 흉하게 일그러졌다. 병원 진단 결과는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았다. 한센병이었다.
마을에 ‘명남이가 한센병에 감염됐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격리 수용을 하라고 집집마다 난리였다. 농번기가 되면 품앗이를 해야 하는데 이 선교사의 집은 마을에서 ‘왕따’를 당했다. 집안에 한센환자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미 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셨고 이 선교사가 한센병에 감염된 이후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할머니는 마을 사람들의 성화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 선교사를 산골짜기 움막에 데려다 줬다.
2년간 가족들과 떨어져 산골짜기 움막에서 살아야 했다. 푸른 꿈을 꿔야 할 10대, 그렇게 이 선교사의 인생은 잿빛으로 변해갔다. 자살하기 위해 움막에 불을 질렀다. 다행히 지나가던 나무꾼에 의해 발견돼 구조됐다. 죽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할머니가 움막을 지나며 ‘소록도 가면 될 텐데 여기서 왜 고생하냐?’고 했다. 다음날 이 선교사는 곧바로 짐을 쌌다. 고향을 등지고 새 삶을 찾기 위해 소록도로 간 것이다.
소록도에서 새로운 희망을 꿈꿨지만 이명남 선교사에게 있어서 그곳은 더 큰 절망의 장소였다. 얼굴 형체가 없어진 사람, 손이 뭉개진 사람, 눈이 먼 사람 등등. 모두 한센병 때문에 그렇게 병들어간 사람들이 수 천 명이었다.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어버렸던 이 선교사는 결국 바다가 보이는 바위로 올라갔다.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바다 밑에서 유영하는 숭어 떼들이 그렇게 징그러울 수가 없었다.
“논에서 만날 미꾸라지만 봤는데 ‘내가 바다로 떨어지면 저 큰 물고기가 나를 뜯어 먹겠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죽어도 ‘고기밥이 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바위에서 내려왔죠.”
다시 정착촌으로 돌아왔다. 같은 한센병 환자인 오근옥 장로의 인도로 교회를 출입하게 된다. 새벽에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에 눈을 떴다. 새벽기도를 시작해 보기로 했다. 6개월 동안 ‘한풀이’같은 기도를 계속했다. 울부짖고 욕하며 처절하게 통곡했다. ‘무슨 죄 때문에 내가 한센병에 걸렸습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나 좀 낫게 해 주십시오’라고 울부짖었다. 기도가 아니라 차라리 절규였다. 그 절규가 가련해서였을까. 하나님은 그의 부르짖음을 간과하지 않았다.
천사들이 소록도에 찾아왔다. 한센병 환자들을 돕기 위해 오스트리아에서 수녀인 마리안느 스퇴거와 마가렛 피사레크가 소록도를 방문했다. 그녀들은 한센병 환자인 이명남 선교사를 지극 정성으로 돌봐줬다. 채혈을 했다. 이튿날 갔더니 그녀들은 “몸은 약한데 독한 약을 너무 많이 먹었다”며 걱정을 했다. 약을 남용을 해서 약이 오히려 독이 됐다는 것이었다. 약을 1/5로 줄여 주었다. 그리고 약도 직접 먹여 주고 치료도 직접 해줬다.
환자들을 돌볼 때 장갑도 끼지 않았다. 머리를 만져주기도 했다. 어릴 때 사랑도 받지 못하고 자란 17살 청년, 그들이 머리를 만져 주면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그녀들은 정말 천사 같았다. 마음에 평온함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들이 지시하는 대로 약을 먹기 시작했고 식사도 제법 잘했다.
꾸준히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자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빠진 머리가 나기 시작했다. 막혔던 코가 뚫리기 시작했다. 숨쉬기가 무척 힘들었었는데 코가 트이는 게 느껴졌다. 잘 보이지 않던 눈도 보이기 시작했다. 회복이 시작된 거였다. 시간이 더 흘러 완전히 정상인처럼 회복이 됐고 최종적으로 음성 판정을 받게 됐다. 이명남 선교사는 이날을 세상에서 두 번째 태어난 날이라고 설명한다. 이 때가 1967년 5월의 일이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소록도에 안녕을 고한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사람들의 시선은 여전히 냉담했다. ‘한센병이 나을 리 없다’며 이 선교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한센병은 피부병입니다. 병균이 침입하면 피부를 거칠게 하고 신경을 자극합니다. 눈이 멀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피부가 뭉개집니다. 외관상 모양이 안 좋아지죠. 그러나 그뿐입니다. 감기에 걸렸다가 나으면 나은 겁니다. 감기 걸렸던 사람이라고 차별하고 냉대해서는 안되겠죠. 한센병도 마찬가지입니다. 감기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무척이나 무서운 병이지만 치료가 되면 흔적만 남을 뿐 이상한 전염병을 옮기는 사람이 아닙니다. 이해를 못하던 시절에 한센병을 천형이라고 하며 음성판정을 받았다고 해도 가까이 하지를 않았죠.”
고향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다시 소록도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 선교사는 결국 부산 용호동의 한센인 정착촌에 자리를 잡게 됐다.
용호동의 교회에서 성가대 지휘를 했다. 틈틈이 소록도에서 오르간을 배웠는데 그 솜씨를 보고는 사람들이 성가대 지휘를 맡긴 거였다. 어느 주일날, 비한센인 아가씨 한명이 교회 예배에 참석했다. 너무 아름다웠다. 기도가 나왔다. ‘하나님, 저도 나이가 25살이나 돼 가는데 저런 예쁜 아가씨와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면 안 되겠습니까? 저 아가씨를 만나면 안 될까요?’ 한센병을 치유해 주신 하나님은 이 기도도 들어주셨다.
그 이튿날 부산 시내를 걷다가 정말 우연히 길에서 그녀를 만났다. 이 선교사는 너무도 반가워서 그녀에게 다가가 “어? 어제 우리 교회 왔던 분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의외로 이 선교사를 피하지도 않고 “맞습니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센병 환자들 안 무섭습니까?”
“네, 안 무서워요.” 이 선교사가 신이 나서 더 물었다.
“내가 교회 성가대 지휘자인대, 지휘 어떻던가요?”
“멋지던대요?” 그날로 이 선교사는 그녀와 교제를 시작했다.
결국 둘은 주변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 결혼에 골인한다. 한센인 정착촌이 생긴 이래 비한센인과의 결혼은 이명남 선교사가 유일했다.
이 선교사는 처음에는 한센인이라는 것을 숨기고 살았다. 그래도 큰 문제 될 게 없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일반인과 아무런 차이도 없어 보일 정도로 완치가 됐기 때문이다. 용호동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 목사님의 설교가 마음에 와서 박혔다. 눅 17:1~19절 말씀을 본문으로 설교했는데 예수님이 고쳐 주신 한센 환자들 중 한사람만 돌아와 예수님께 감사했다는 내용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치료해주셨는데 나는 비겁하게 감사하지 못하고 한센병이었던 사실을 숨기고 피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수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한센병에 대한 편견을 깨고 싶어 저의 약함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월급을 쪼개 한센인들에게 옷과 의약품을 가져다주는 정도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2002년도에 본격적으로 사역을 하기 위해 한센국제선교회를 설립한 겁니다. 이런 일을 기독교인이 아니면 누가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일을 시키기 위해 저를 깨끗하게 치료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이 선교사는 한센인을 돕기 위해 세계를 다니고 있다. 연변 조선족 자치구, 중국, 인도, 필리핀 등의 한센인들이 사역의 대상이다. 그곳의 한센병 환자들을 찾아다니며 같이 먹고 자고 기도하고 노래하면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고 있다. 그들을 찾을 때 국내에서 후원받은 각종 지원물품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외국의 한센인들은 가까운 친족들도 자신들을 버렸는데 잘 사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오지까지 찾아와 자신들을 돌봐준다며 이명남 선교사를 보면 손을 맞잡고 눈물짓는다. 마치 이 선교사가 50여 년 전 천사와 같았던 오스트리아의 간호사들에게 큰 감동과 위로를 받은 것처럼 말이다. 그의 손길은 그 때의 간호사들처럼 부드럽지는 못하다. 그러나 그의 거친 손에서는 천사들만이 풍길 수 있는 향기가 피어나는 것 같다. 그 향기는 지금 천형이라며 가족도 친지들도 친구들도 버린 한센인들 사이에서 조용히 퍼져가고 있다.
이명남 선교사 1947년 충남 금산의 작은 농촌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4학년 한센병을 앓았으나 소록도에서 기적적으로 치유 받았다. 교회에서 만난 건강하고 아름다운 자매에게 첫눈에 반해 결혼하였다. 가난한 형편 속에서 자녀를 낳고 살아오면서 한센인에 대한 사회의 무시와 냉대로 자녀교육과 사회생활에서 많은 차별을 겪었다. 그러나 생업에 대한 애착으로 제일제당 지역부장까지 지내며 두 자녀를 잘 키워 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확신하여 2000년부터는 중국의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한센인 전문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중국 연길의 한센자녀 장학금 지원, 중국 광동성 한센마을 의료지원, 인도 뱅갈로 한센마을 방문지원, 필리핀 딸라 한센마을 의약품 지원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선교사로서의 체계적 배움에 갈급해 고신대학교 선교대학원과 부산 장신대 평신도선교대학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는 <하늘의 별을 딴 사나이>(1992년, 교회복음신문사), <소록도여 안녕>(2007년, 홍성사) 등이 있고 교회복음신문사(사장 김성원)의 17주년 기념사업으로 중국 연변 조선족 한센병자 선교사로 2003년 파송받았다. CBS ‘새롭게 하소서’에 2010년 3월 1일 출연했고, 제4회 21세기포럼(이사장 장성만) 기독교문화대상 봉사부문을 수상했다. 한센병자 선교사역을 인정받아 중국 연길시 인민정부가 수여하는 감사패를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