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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어느 교회도 깨닫지 못한 걸 다락방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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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 어느 교회도 깨닫지 못한 걸 다락방이···”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3.02.04 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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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출신 목회자가 밝히는 류광수 목사의 신학적 문제(3)

다락방 출신 목회자가 밝히는 류광수 목사의 신학적 문제점을 올립니다. 이 원고는 이광은 목사(우리주님의교회)가 2008년에 다락방 신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수정을 촉구하기 위해 쓴 글입니다. 이 목사는 2004년까지는 평범한 다락방 목사였으나 2005년부터 다락방 신학의 문제점을 알게 되어 고통스러워하다가 2009년 류광수 목사에게 다락방 메시지 수정을 촉구하며 신학 질의를 하고 탈퇴한 목사입니다. 이 목사의 문장은 쉽고 짧고 간결합니다. 더 큰 장점은 그러면서도 다락방의 핵심적 문제점을 파고 든다는 점입니다. “다락방이 왜 이단인가?” 궁금한 독자 여러분들도 이 글을 읽다보면 다락방 이해에 큰 도움을 받으리라 사려됩니다. 이 원고는 복음의 수호자 안티 다락넷(cafe.naver.com/antidarak)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본 지(www.kportalnews.co.kr)에는 총 10여 차례에 걸쳐 연재합니다<편집자주>

▲ 개혁측으로의 가입을 자축하고 있는 다락방측 교회

다락방 복음과 십자가 복음(3) -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관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16:16). 다락방에서 이 구절을 얼마나 자주 설교하고, 자랑스러워하는지 말 안해도 잘 아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모든 축복을 부으셨을 정도로 귀중히 여기셨던 단어 “그리스도”. 수 천년 구약 모든 선지자들이 기대했던 히브리 단어로 “메시아”. 그 예언을 신약에 성취한 단어 헬라어로 “그리스도”. 바울과 초대교회 복음의 핵심 메시지 “예수는 그리스도”(행 17:3). 이 그리스도를 전 세계 어느 교회도 깨닫지 못했는데 다락방이 2천년 만에 회복했다는 겁니다. 다락방의 자부심 중의 자부심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또 하나의 자부심, 다락방 20가지 전략은 나중에 언급하겠습니다).

“그리스도”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스스로 자랑스러워하듯 다락방은 실제로 그리스도를 가장 많이 말하고 강조하는 단체인 것 같습니다. 설교의 제목이나 메시지에 나오는 그리스도 단어 수 등을 객관적으로 비교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설교하는 목사나, 설교를 듣는 성도나 모두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전하고 있고, 듣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렘넌트, RUTC가 더 중요하지만... 참 이상하죠... 강조점이 그리스도에서 언제 RUTC 건물이 되어버렸는지... 만약 류목사가 그리스도가 아닌 다른 것을 전하면 다락방을 떠나겠다는 분들이 대부분일 겁니다. 이러한 순수함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다락방을 이단시비 속에서도 여전히 결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살펴보겠습니다.

1. 다락방 복음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 죄 가운데 빠져 사탄에게 잡혀있다. 그리스도는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의미이다. 구약에서 왕, 선지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었는데 예수님이 바로 왕, 선지자, 제사장의 일을 하신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사탄을 꺾는 참 왕으로(요일 3:8), 죄 문제를 해결하신 참 제사장으로(롬 8:2), 하나님 만나는 길이 되신 참 선지자(요 14:6)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 일은 단번에, 완전히, 영원히 해결하셨다. 다락방은 그리스도를 전할 때 반드시 왕 선지자 제사장(이하 삼중직)으로 설명한다. 일반교회 목사가 그리스도 설명할 때 삼중직이 나오지 않으면 다락방 사람들은 “저 목사는 그리스도 못 깨달았다”고 쉽게 말하고 혹 우연의 일치로 그리스도를 삼중직으로 설명하면 “다락방 메시지를 참고했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다락방은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한 애착과 확신이 강하다.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락방처럼 삼중직으로 설명되어야만 하는가? 일반교회에서 그리스도를 설명할 때 다락방식으로 선지자·제사장·왕으로 설명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리스도를 잘못 가르치는 것인가? 많은 다락방 사람들이 확신하는 것이 이것이다.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라고 고백했을 때 다락방처럼 삼중직의 의미로 고백한 것이고 바울이 마게도냐와 소아시아를 다니며 전한 복음의 내용도 바로 예수가 선지자·제사장·왕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설명한 것이다. 과연 그럴까?

2. 십자가 복음
(1) 그리스도는 예수의 십자가 대속 사건을 일컬을 때 사용된 칭호이다.
십자가 복음의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 단어를 이해하려면 초대교회 당시의 배경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렇게 해야만 그리스도라는 용어를 바울과 초대교회 사도들이 그 당시 사람들에게 무슨 의미로 설명했는지 알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선택받은 유일한 백성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복의 근원으로 삼겠다고 선언하시고(창 12장) 아브라함 자손이 번성하여 큰 민족을 이룰 것과 그 자손들이 기거하게 될 땅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창 15장)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된 증표로 할례를 주셨다(창 17장).

참고로, 창15장은 아브라함이 제사 잘못지내 벌 받는 장면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쪼갠 짐승사이를 지나며 자신이 앞 구절에서 하신 말씀 곧 자손의 번성과 그들이 기거하게 될 땅을 주신다는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겠다고 언약을 맺는 장면이다. 짐승을 쪼개는 것은 누구든지 이 언약을 어기면 이 짐승처럼 죽게 된다는 의미로 당시 고대 근동국가의 언약체결 방식이었다.

하나님은 430년간 애굽에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그 약속대로 모세를 통해서 건져내셨고 그 언약이 성취되게 하셨다. 이러한 출애굽과정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모든 민족들을 멸하시고 그 땅을 얻게 하셨다. 이 사실만 가지고도 이스라엘은 하나님 백성에 대한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더욱이 이스라엘은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 다윗 왕 때에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하나님은 성전을 건축하려던 다윗 왕에게 나단 선지자를 통해서 예언을 주신다.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 곧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핵심 기반이 된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삼하 7:13-16)

첫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이 성전을 건축하게 하신다(7:13).
둘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칭하실 것이다(7:14).
셋째, 하나님은 다윗의 아들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케 하실 것이다(7:16).

나단의 예언은 가깝게는 다윗의 아들 솔로몬에게 성취되어졌다.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했고 이스라엘의 영토를 가장 크게 확대시켰다. 심지어 먼 아프리카의 시바여왕이 예물을 들고 찾아올 정도로 강대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었다. 다윗 이후의 이스라엘 왕들은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졌다(시편 2편은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왕의 등극식 때 부르는 노래이다. 저희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나의 왕을 시온에 세웠도다. 너는 내 아들이라 내가 오늘 너를 낳았도다.
신약교회는 시편 2편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킨다).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직접 통치해주시는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요.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왕을 아들로 삼으셔서 직접 다스려 주셨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솔로몬 왕 이후 두 나라로 분열되어 계속 몰락의 길을 걷고 결국에는 앗수르 바벨론에게 포로로 잡혀가게 된다.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큰 혼란이 생기게 된다.

하나님이 다윗 왕에게 주셨던 예언은 어떻게 된 것인가? 솔로몬이 지은 하나님의 성전은 모두 무너졌고 하나님의 아들 시드기야 왕은 두 눈이 뽑혀 바벨론으로 잡혀갔고 다윗의 위는 견고하게 되기는 커녕 하나님 나라 이스라엘이 완전 망해버렸다. 이 엄청난 신학적 혼란은 학사 에스라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한 것을 회개하는 율법 회복운동이 일어나게 만들고, 다시 한 번 나단 선지자를 통해 주신 이스라엘의 영광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을 기다리는 메시아 대망사상으로 연결된다.

우리가 멸망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 율법을 제대로 지키지 않아서였다. 그러나 이제라도 우리가 율법을 잘 지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면, 하나님이 다시 메시야 곧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 왕을 보내주시고 우리 민족을 전 세계의 최고 민족으로 다시 세우실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제국의 속국이었다. 이스라엘의 형편이 어려우면 어려워질수록 사람들은
나난 선지자가 예언한 메시야 곧 다윗 왕의 영광을 회복할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 왕을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였다. 여기서 우리는 유대인들이 사용하던 메시아(그리스도), 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라는 것을 알게 된다.

유대인들에게 메시아,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에게 붙이는 칭호였다. 삼하 1:14을 보면 다윗이 사울왕의 죽은 소식을 가지고 찾아온 아말렉 소년을 책망하는 구절이 나온다.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이 구절을 히브리어 성경으로 보면 한글성경에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번역된 단어가 바로 메시아(messiah) 이다. 즉 사울 왕이 바로 메시아로 기록되어졌다.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 성경에서 이 구절을 보면 역시 “주의 그리스도를”(ton criston kuriou) 죽였다고 나온다. 즉 유대인들은 사울 왕을 그리스도라고 부르는데 아무 이상함도 없었다.

이 말은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우리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의 본체시며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 죄를 담당하기 위해 오신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라는 의미 보다는 어떤 직분을 위해 하나님이 쓰시는 위대한 사람 정도의 의미였다.

한 예로 AD 132년 유대 최고 랍비 아키바가 당시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출하려던 민족적 영웅 바르 코흐바를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공식 선포했다(김세윤, 바울복음의 기원 P82).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어떤 존재로 인식했는가에 대한 단적인 예이다.

그리스도에 용어에 대한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또 현실적으로는 로마의 지배하에 있어 하나님 백성이라는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해있는 유대인들에게, 소망은 오직 하나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이스라엘의 모든 영광을 회복해줄 하나님이 보낸 사람, 위대한 지도자 곧 그리스도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 예수께서 유대 땅에 오셔서 말씀과 기적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니 유대인들에게 큰 기대감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례요한이 앞서 와서 예수를 증거하였으니 말이다. 드디어 우리를 로마에서 해방시키고 모든 이방인 위에 뛰어나게 하실 다윗의 자손 그리스도가 오셨구나. 그러나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염원과는 달리 예수께서는 이스라엘 독립 같은 영웅적인 일을 하지 않으시고 죄사함, 속죄, 교회, 같은 메시지만 하시다가 대제사장들에 의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를 왜 십자가에 죽이려고 했는가를 이해해야 한다. 이스라엘은 죄인을 죽일 사형법이 없어서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스데반이 돌로 쳐서 죽일 때 그들은 로마에 의해 아무런 제제나 거리낌을 받지 않았다. 이스라엘 종교법에 의해 얼마든지 사형시킬 수 있다. 대제사장들은 이스라엘의 종교법으로 예수를 돌로쳐서 처형하면 그 제자들에 의해 예수의 가르침이 멈추지 않고 더욱 확대될 것을 두려워했다. 즉 구약의 위대한 선지자들이 다 핍박받은 것처럼 예수도 핍박받아 죽었다. 이것만 봐도 예수는 올바른 분이 아닌가, 그리고 그 분을 죽인 자들은···.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성경의 율법을 사용하기로 원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신명기 21:23 말씀이다.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아래 있는 자라”. 예수를 십자가에 메달아 죽여야 제자들이 예수는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저주받아 죽은 자로 알고 그 가르침을 포기하리라. 이것이 바로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계속해서 말씀하시던 내용이었다.

복음서에 많은 구절이 있지만 간단하게 몇 구절만,
요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막10:45 인자가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하심이라.
마26:28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종교지도자들의 의도대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에게는 큰 혼란이 일어났다. 율법에 의하며 나무에 달려 죽은 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인데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는 하나님의 저주받은 자가 아닌가? 하나님의 저주받아 죽은 자가 어떻게 우리 메시아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제자들과 예수를 따르던 무리들은 크게 낙심하고 흩어지게 되었다.

이때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예수 부활은 우리 육체가 죽지 않고 후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개인적 소망을 주는 정도가 아니다. 예수 부활은 예수께서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으신 분이 아니요 바로 우리를 대신하여 저주를 받으시고 대속제물로 죽으신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속죄 제물로 받으시고 인류의 모든 죄를 담당시키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예수께서는 공생애 기간동안 내내 제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예언하셨던 것이다.

예수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 제자들은 지나간 예수의 모든 메시지가 깨달아지기 시작했다. 예수는 단순히 우리를 로마의 속국에서 건져내줄 육신적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몸을 하나님 앞에 속죄제물로 드리심으로 전 인류를 죄와 사망의 저주에서 건져내시고 하나님 자녀 만드시는 분으로 올바로 깨닫게 되었다. 이때부터 유대교의 그리스도와 기독교의 그리스도가 의미적으로 확연하게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보내시겠다고 하신 그리스도는 한 민족을 구원하는 육신적 지도자가 아니라 바로 온 인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제물이 되심으로, 아담의 원죄로 인해 부패한 죄의 본성을 가지고 태어나 죄와 사망에 종노릇하며 사탄의 공격과 참소당하는 인간을 하나님 자녀 삼으시고 미래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뿐만 아니라 지금 미래에 얻을 구원을 축복을 불완전하지만 선취적으로 맛보게 하시고 새로운 하나님 백성의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서 아담으로 인해 타락한 세상을 부분적으로 나마 다시 회복시키시다가 재림의 주로 오셔서 모든 것을 완전 회복시키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이것이 바로 구약 성경 전부가 예언하고 있던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미였음을 초대교회가 구약성경 예언과 그 예언의 성취인 예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을 통해 확인하게 된 사실이었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예수 부활을 직접 체험한 초대교회는 그 이후부터 유대인들이 육신적으로 자신들에게만 사용했던 다윗의 자손, 이스라엘의 왕, 하나님의 아들, 성전, 아브라함 자손 등 모두를 영적으로 확대 해석해서 또 이것이 그 성경을 기록한 선지자들과 또 그 구절을 기록하게 하신 하나님의 본래적 의미이다라고 자신있게 확신하며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십자가로 거듭난 이방인을 포함한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자들은 온 천하에 다니면서 이 사실을 증거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기독교 복음이었다.

구약성경을 읽으며 이스라엘의 육신적 회복을 기다리는 유대인들에게는 구약에서 예언한 그리스도는 육신적 지도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얼마 전에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가 하나님의 속죄제물로 보내신 진정한 그리스도라고, 예수의 부활이 이 사실을 증거하지 않느냐고 헬라지방 회당에서 율법을 읽고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너희들이 기다리는 그리스도는 바로 얼마 전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예수시다.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이 내용을 밝히 증거한 것이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17:2)

데살로니가 회당에서 바울이 한 이 메시지는, 구약 성경에서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실 분이 그리스도인데, 그분이 바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이란 것이다. 부활은 예수가 자기의 죽으심을 통하여 하나님이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보내신 그리스도이신 결정적인 증거였기 때문에 제자들은 가는 곳 마다 예수의 십자가 대속을 증거하고 그 확고한 증거로 예수 부활을 제시하였다. 예수 부활은 실제적 사실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 증거를 반박하지 못했고 기독교 복음은 거침없이 확산되어져 나갔다.

신약성경의 서신서들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에 관한 구절로 가득 차있다. 몇 구절만 간단히 적어본다면 다음과 같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고후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갈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벧전 2:24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증명하기 위하여 더 많은 구절이 필요한가? 정말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그 죽으심으로 우리가 얻게 된 죄사함의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초대교회의 증거했던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복음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그리스도는 말을 타고 정복자로 와서 이스라엘 민족을 육신적으로 구원해줄 유대인만을 위한 위대한 인간 영웅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와서 속죄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하나님을 거부하여 죄와 사망에게 매여 일생을 종노릇하는 온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심으로 다시 그들을 하나님 자녀로 삼으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분을 지칭하는 것이다.

한가지 더 추가해보면 부활하셔서 하나님 보좌우편에 계시며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고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란 의미로 쓸 때는 “주”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가장 중요한 기독론적 칭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신약성경과 바울서신의 그리스도라는 단어는 반드시 십자가 사건과 직접 연관되어 사용된다.

(2) 그렇다면 개혁교회가 주장하는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무엇인가?
그리스도를 삼중직으로 설명하는 것은 칼빈에 의해 최종 정립된 개혁교회 신학의 귀중한 전통이다. 교회사를 살펴보면 그리스도 삼중직에 대한 최초 언급은 AD 4세기경 유세비우스(260-340)에 의해서였고 이것을 오늘의 삼중직으로 정립한 사람이 바로 16세기의 요한 칼빈(1509-1564)이다. 개혁교회의 삼중직은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우리 중보자 예수 그리스도를 구약의 그리스도를 예표한 선지자, 제사장, 왕과 비교하며 설명하는 방식이다. 박형룡박사의 조직신학을 잠시 참고해보면 다음과 같다.

선지자 -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하늘 위에 계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자기의 선지적 사역을 땅 위에서 계속하신다. 그는 자기의 제자들을 떠나시기 전에 그들에게 약속하신대로 성령을 보내시어 그들의 기억력을 보조하시며 그들에게 새 진리를 가르치시며 그들을 모든 진리의 이해에서 인도하시며 그들을 그리스도 자신의 충만에 의하여 풍부케 하신 것이었다(요14:26,16:7-15). 그 약속이 성취된 오순절 날부터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큰 선지자의 활동을 여러 모양으로 행하셨으니, 성경의 영감에서, 사도들과 교역자들의 전도에서, 교회를 인도하여 진리의 기둥과 터로 만드심에서, 진리를 신자들의 마음과 생활에 유효하게 만드심에서 그리하셨다.

제사장 - 하늘 위의 그리스도는 또한 제사장의 사역을 수행하신다. 그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이은 영원한 제사장이시다. 그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그의 능동적 수난이 종결되었다는 의미의 표현이요, 그의 제사적 사역에 그 종점에 도달하였다 하심이 아니었다. 그의 제사적 사역은 하나님 우편에서 계속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한다.

왕 - 성경은 그리스도의 재위를 자주 그의 왕정과 연결시켜 말한다. 그는 그의 성령으로 그의 교회를 통치하고 보호하시며 그의 임명하신 직원들을 통하여 이것을 관리하신다. 천상만군은 그의 휘하에 있으니 천사들은 그의 사자들로서 성도들에게 그의 주시는 복을 전달하며 그들을 주위의 위험에 대항하여 보호하기로 항상 준비되어 있다. 그는 자연의 세력 위에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모든 권력 위에 권위를 행사하시어 통치하시기를 그가 최종원수를 굴복시킬 때까지 하실 것이다.

개혁교회의 자랑스러운 전통 그리스도의 삼중직은 한가지 십자가 사건에 대한 세가지 설명이다. 즉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성령으로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시고 인도하신다(선지자),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우리 대제사장이 되셔서 우리의 속죄사역을 이루시고 계신다(제사장). 십자가에서 대속제물로 죽으신 그리스도가 지금 만왕의 왕이 되셔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인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온 우주를 통치하고 계신다(왕). 이 얼마나 정확하고 귀중한 설명인가?

십자가 사건이 먼저이다. 그리스도의 의미는 십자가 사건이 본질이고 그 십자가 사건을 세가지 방향으로 적용해서 설명하는 것이 개혁교회의 그리스도 삼중직의 의미이다. 다락방처럼 삼중직을 먼저 설명하고 그것이 초대교회가 붙잡았던 그리스도의 의미라고 말하는 것은 벌써 시대착오적인 오류이다. 아무리 교회 역사를 찾아보아도 최초 언급은, 그것도 불완전한 삼중직으로 AD 4세기에 가서야 겨우 나오는데(그 이전에는 전혀 없다) 초대교회가 그리스도를 다락방처럼 삼중직으로 설명했다는 것은 큰 오해이다.

(3) 그렇다면 다락방의 삼중직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다락방의 삼중직은 제사장 부분은 같지만 선지자와 왕직에 관한 설명은 개혁신학과 조금 다르다. 그러나 다락방에서 그리스도를 개혁신학과 조금 다르게 하나님 만나는 길되신 선지자, 죄문제 해결하신 제사장 사탄의 세력을 꺽으신 왕으로 설명하는 것 자체를 틀렸다고 할 마음은 없다. 이것은 불신자 전도 현장에서 개인적인 적용으로 볼 때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을 만한 내용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적절한 설명이라고까지 볼 수 있다.(단 불신자 전도 상황일 때라는 단서가 붙을 경우이다)

책을 읽기보다는 생활 속에서 한 푼 아껴가며 치열하게 살고 있는 한국 일반인들을 전도할 때
계시의 전달자로서의 선지자 보다는 하나님 만나게 하는 선지자가 훨씬 이해하기 쉽다. 지금 당장 귀신에 잡혀 고통당하고 있는 불신자들에게 온 세상을 통치하는 천년왕국의 왕보다는 당신을 괴롭히는 사탄을 꺽은 왕이 훨씬 실감나는 설명인 것 같다.

그러나 주의해야할 점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 설명할 때는 반드시 십자가 대속이 주된 강조점이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본래적 의미이기 때문이다.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신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괴롭히는 사탄의 세력을 꺽으셨다. 십자가 보혈이 당신의 문제를 해결한다. 하나님을 만나게 하신다. 이런 전도에 대해서 누가 뭐라고 할 것인가?

분명 다락방의 삼중직은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강조하는 내용 위에 불신자 전도시 개인에 따라 적용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에 유익을 주는 전도의 좋은 도구가 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처럼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에 대한 내용은 없고 혹 십자가를 언급하더라도 그냥 지나가는 단어 수준이라면, 다락방의 삼중직은 과격하게 말하면 바울이 갈라디아서에 언급한 다른 복음(갈1:6-9)에 해당될 수도 있다.

갈라디아 교회 이단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엄청난 괴물이 아니다. 초대교회 내의 유력한 히브리파 지도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믿되 할례도 행하고 율법을 조금 추가하자는 정도의 것이다. 바울은 이 작은 것을 십자가를 거부하는 저주 받을 복음이라고까지 말한다. 하물며 십자가에서 이루신 속죄사역은 전혀 강조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오늘 내 개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바울은 무엇이라고 말할 것인가?

다락방 사람들은 자기는 제사장 직을 통해 그리스도의 속죄를 설명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되게 이야기해보자. 속죄사역이 사탄을 꺽은 것인가? 아니면 왕직을 설명하기 위한 속죄사역인가? 어디에 강조점을 두고 계신가? 십자가의 속죄사역이 사탄을 꺽는 왕직의 근거가 된다고 철저하게 가르치고 계신가? 불신자에게 사탄문제가 해결되려면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고 자기의 죄인 됨을 인정하고 그분의 속죄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피맺히게 설명하시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다락방 복음이 아니라 우리와 같은 십자가 복음을 믿는 분이다. 우리 같이 힘을 합쳐, 다락방 복음이 아니라 십자가 복음을 전하자. 예수를 사랑하는 다락방의 진실된 모든 분들께 부탁드린다. 불신자 전도현장에서 그리스도의 삼중직 특히 왕직을 강조하되 십자가 대속에 철저히 의지해서 가르쳐달라고···. 그래야만 다락방 복음이 한국교회에 유익을 주는 전도내용이 될 것이고, 다락방 복음이 십자가 복음이 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다락방 복음은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게 저주받을 다른 복음으로 확인 될지도 모른다. 다음에는 다락방 핵심 표어인 예수 그리스도, 모든 문제 해결자에 대해서 설명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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