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뉴스미션 2013년 4월 5일에 올린 김동수 교수(평택대)의 칼럼입니다. 글의 요지는 정이철 목사의 <신사도운동에 빠진 교회: 한국교회 속의 뒤틀린 성령운동>에 나타난 기본적인 전제를 비판하는 데 맞춰져 있습니다. 김 교수는 정 목사의 전제가 은사종료·중지론에 기초하고 있다고 분석하고 그가 거의 모든 성령운동을 신사도운동으로 비판하고 있다고 해석했습니다.
김 교수는 정 목사가 은사 중지론의 카테고리 안에서 방언을 주장하는 김우현, 치유를 주장하는 손기철, 예언을 주장하는 김하중을 비판하는데 사실상 그 비판의 전제는 오순절적 신앙형태를 부정하는 것에서 온 것이라며 “치유는 인정하지만 (정이철 목사는)방언과 예언이 현재에 지속된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지적합니다. 김 교수는 정 목사를 향해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오직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을 따르는 자들로 보인다”며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의 역사들이 예수님이 재림할 때까지 그대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정통인 셈이다”라고 주장했습니다.
신사도운동을 주의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건전한 성령운동까지 도매금으로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이죠. 성령의 초자연적인 은사를 인정하고 그것이 실제로 교회 사역에서 활용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이 한국교회 건전한 신앙인의 일원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자체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신천지 이후 가장 큰 이단 문제는 ‘신사도운동’이 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는 때입니다. 신사도운동에 대한 비판은 제기됐지만 그 범위를 어느 정도까지 정하느냐 하는 문제를 놓고 반박하는 글은 흔치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 사이트에 뉴스미션에 기고한 김 교수의 글을 그대로 게재합니다. 독자들이 조금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는 데 도움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다음은 김동수 교수의 글 전문입니다.
----------------------------------
한국 복음주의권 목회자의 대표자격인 이동원 목사는 최근 국내판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 2013년 3월호 사설에서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자들에게 애정 어린 충고를 한 마디 던진다. 자신의 신앙과 신학도 내용을 따지고 보면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말하면서, 하지만 개혁주의적 복음주의가 다른 신앙전통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는 보다 열린 복음주의로, 다른 교파의 신학에 대해서 보다 포용적으로 바뀌어야 함을 역설한다. 유독 한국의 개혁주의적 복음주의는 타 교파의 신학을 포용하지 못하고 정죄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의 복음주의의 대표적 신학교인 트리니트 신학교를 다니면서 열린 복음주의를 경험하고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최근에 한국 교회의 성령 운동을 신사도 운동이라는 카테고리로 몰아넣고 비판한 정이철의 『신사도 운동에 빠진 교회: 한국교회 속의 뒤틀린 성령운동』(서울: 새물결플러스, 2012)을 읽고 나도 이동원 목사와 같은 말을 저자에게 하고 싶다. 본서의 저자는 기독교 교파 신학의 다양성을 거의 인정하지 않고 매우 편협한 자신의 입장에서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거의 모든 성령운동을 비판하고 있다. 또 성서학자가 볼 때 그의 성서해석은 아마추어 수준을 약간 벗어난 정도로, 성서 본문 본래의 정황과 저자의 신학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교파 혹은 자신의 도그마적 해석에 빠져 있다. 본서는 성령 운동이 성경이 말하는 정도를 벗어난 사례들에 대해 정당한 비판도 포함하고 있으나, 그가 전제하고 있는 도그마는 매우 편협하며, 그의 판단은 극단적으로 단정적인 경우가 많다.
나는 본서가 주장하는 구체적인 것보다도 본서의 저자가 당연시 하고 있는 그의 전제를 비판하려고 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적 도그마에 빠져 있다. 그것은 이런 것이다. (1) 성경의 성격은 하나님의 계시다. (2) 사도들의 역할은 계시를 기록하는데 있었고, 계시는 사도들로 인해 종결되었다. (3) 대부분의 기적적인 은사들(치유는 예외?)은 사도들의 계시의 방편이었기 때문에 그것들은 사도들의 사라짐과 함께 그쳤다. (4) 그래서 이러한 은사들(사도, 예언자, 방언, 예언 등)이 지금도 계속된다고 하는 것은 사도들이 지금도 존재한다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들을 주장하는 것은 일종의 신사도 운동이다. (5) 한국에서 많은 성령운동이 위와 같은 은사들을 인정하기에 그것들은 신사도운동일 수밖에 없다.
나는 다른 책들(『신약이 말하는 방언』; 『방언은 고귀한 하늘의 언어』)에서 이미 바울이 말하는 방언과 예언과 방언 통역이 계시적 은사가 아니라는 것을 밝혔다. 그래서 여기서는 다른 문제에 집중해서 위 견해를 비판하려고 한다. 우선, 성령의 초자연적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는 것과 신사도 운동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 신사도운동은 피터 와그너가 그의 책 『신사도적 교회로의 변화』(서울: 쉐키나, 2006)에서 제기한 대로 이천 년 이후를 ‘제2의 사도시대’로 규정한 것에 근거한다. 아마도 정이철이 신사도 운동이라고 몰아붙인 대부분의 인물이나 단체는 지금이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본 와그너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신사도운동이라는 말을 너무 확대해서 해석하고 있다.
나는 성서에서 옛 언약 시대(구약 시대)와 새 언약 신대(신약시대)를 명확히 구분했다고 본다(렘 31:33). 그리고 신약 시대는 예수 시대와 교회 시대로 구분된다. 요한은 그 기점을 제자들이 성령을 받는 때라고 본다(요 7:39). 사실 이것들 외에 신약성경은 어떤 의미 있는 시대 구분도 하지 않는다. 사도 시대와 그 이후 시대의 구분도 인위적일 뿐 성서가 우리에게 제시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시대를 교회 시대에서 따로 떼어 놓은 정이철이나 이 시대를 ‘제2의 사도시대’라고 보는 와그너의 구분은 모두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교회사적으로 이런 구분은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이 이것을 구분하여 그에 따른 성령의 역사가 다르게 일어난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음으로, 정이철의 문제는 그의 비판이 초자연적 은사중지론의 입장에서 은사가 지금도 있다고 하는 사람들을 비판한 것이다. 그가 여러 사람들을 신사도 운동의 카테고리 안에 넣어 비판한 것은 결국 은사가 지금 지속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을 전개한 사람들에 대한 것이다. 그는 방언은 주장하는 김우현, 치유를 주장하는 손기철, 예언을 주장하는 김하중을 비판하는데, 그 내용을 보면 사실 이들 각각이 이러한 은사가 지금도 존재한다고 믿고 그러한 신앙 행동을 한다는데 있다. 내가 볼 때 그가 비판한 많은 내용은 그가 오순절적 신앙 행습에 익숙하지 않고, 그러한 신앙 형태를 부정하는 것에서 온 것이다. 그는 치유는 인정하지만, 방언과 예언이 현재에 지속된다고 믿지 않는다. 이러한 은사들이 지금도 계속된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별 문제가 되지 않는 것들이 그에게는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본서 저자의 문제는 그는 하나의 정통 신앙이 있고, 그것으로 다른 신앙 형태를 다 재단해 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는 웨슬레는 인정하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이외에 알미니안적 신앙 전통에 대해서는 그는 매우 교조적으로 비판한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오직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을 따르는 자들로 보이며, 오순절 운동과 그것을 잇는 20세기 이후의 성령운동은 모두 비 정통인 것처럼 보인다. 그에게 있어서 정통은 지금은 성경이 완성된 시대이기 때문에 성령으로부터 조명을 받아 성경을 이해하고 그에 따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 그것만이다. 신약성경이 우리의 삶의 모델이며, 신약 성경에 예수님이 약속한 성령의 역사들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그대로 일어난다고 믿는 사람들은 비 정통인 셈이다. 사도행전을 우리 신앙생활의 모델로 보고 사도행전을 읽는 오순절주의는 그에게 당연히 비정통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일대학교 신학부 조직신학 교수인 미로슬라브 볼프(M. Volf)는 최근 우리말로 번역된 그의 저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서울: 국제제자훈련원, 2012)라는 책에서 성경의 목소리의 다양성과 통일성은 물론, 본문의 다의성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 안에서도 다양성이 있고, 그 말씀의 해석 자체에도 어느 정도 다의성이 있는 것이다. 물론, 본문에 대해서 어떤 해석도 가능한 것은 아니다. 본문은 기호화된 의미이기 때문에 개연성 있는 해석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기독교인 간에 이런 정도의 합의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 “개신교 정통 안에는 개혁주의적 입장(장로교, 침례교 등)과 알미니안적 입장(감리교, 성결교, 오순절파) 등이 있고, 각자는 자신의 입장에서 성서를 해석하고 있다. 그 역사적 기원이나 내용으로 볼 때 모두 의미 있는 해석 전통이다.”
본지 제휴 뉴스미션(http://newsmission.com) 4월 5일자 칼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