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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어떻게 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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콤플렉스, 어떻게 넘을까?
  • 만나교회 장운철 목사
  • 승인 2014.05.28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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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 Ⅱ/ 7 콤플렉스

콤플렉스. 특정한 상황에서 과도하게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아픔 없는 인생 없듯이 콤플렉스 없는 이도 없다. 열등감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크든 작든 차이일 뿐이다. 예를 들어보자. 키 작은 사람에게는 ‘나폴레옹 콤플렉스’라는 게 있다. 자신의 왜소함의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타인을 향해 오히려 더 큰 지배욕을 나타낸다. 욕을 하거나 거칠게 대하고 심지어는 폭력을 쓰는 경우도 있게 된다.

▲ 콤플렉스에 관한 곽금주 교수의 저서 [마음에 박힌 못 하나]

콤플렉스는 또한 ‘트라우마’에 대한 기억들로 형성된다. 지난 날의 아픔은 종종 과거에만 머물지 않고 현재 우리의 의식적 또는 무의식적인 생각, 감정, 행동 등 전반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사고의 흐름을 방해하거나 감정을 지나치게 움직이게도 한다. 평상시와 다르게 당황하거나 분노하는 등 파괴적인 행동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

오늘 우리가 그 콤플렉스에 대해 관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콤플렉스 때문에 ‘나의 하나님 자녀됨’을 잃지 않기 위해서다. ‘나’ 자신만이 아니라 ‘너의 하나님 자녀됨’을 또한 돕기 위해서다. 결론적으로 콤플렉스를 잘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성경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최근 곽금주 교수(서울대학교 심리학과)가 [마음에 박힌 못 하나](쌤앤파커스, 2014)라는 제목의 책을 출간했다. 그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콤플렉스를 18가지로 정리했다. 책을 읽어나가는 동안 필자 주변 사람들이 생각났다. 그들이 보였던 지나친 행동들이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기도 했다. 그 책의 내용 중 7가지만 살펴보려고 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각 콤플렉스의 이름을 필자가 임의로 다시 정했다. 독자께서도 아래의 예들을 보며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을 생각해 보기 바란다.

* 여러 가지 콤플렉스

1. 일중독 콤플렉스

한 마디로 일하지 않으면 아픈 사람이다. 취미도 특별히 없다. 아니 취미를 가지려고 노력하지도 않는다. 그럴 시간도 없고 여유도 없다고 한다. 놀아도 일하듯 논다. 우리들의 어머니를 예로 들어보자. 가정을 세워나가는 데 헌신을 해 왔다. 빠듯한 살림살이로 남편을 섬기고 자녀들을 양육했다. 먹을 것 하나라도 자신보다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온 신경을 썼다. 그러다 세월이 흘러 자녀들이 결혼을 하고 집을 모두 떠나게 된다. 이때부터 문제가 발생된다. 헌신해야 할 ‘일’이 없어진 것이다. 상실감이 커졌다. 마음과 시간에 여유가 생겼지만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이제는 어머니의 인생을 사세요”, “즐기세요”라고 말들이 들려오지만, 마음에 와 닿지 않는다. 그렇게 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할 일이 없으니, 친구들도 만나고, 취미 공동체에 들어가 재미있게 놀려고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다. 몸에 밴 게 일하는 거다. 그래서 놀아도 ‘일 하듯’ 논다. 열심히 논다. 지치도록 논다. 주변에서 “쉬엄쉬엄 노세요”라고까지 말한다. 그런데 쉬면 아플 것 같아서 또 그렇게 못한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많은 경우 우리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을 위해 열심히 달려왔다. 공부, 일에 중독되지 않고는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든 40대 중반을 전후해서 한 번쯤 “내가 인생 제대로 달려왔나?”를 생각하게 된다. 특히 남자에게서 말이다. 내가 원했던 인생이 아니라, 부모님이 원했던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발견하곤 허탈해 진다. 즐거움보다는 과제중심의 인생이었던 것을 보고 답답함을 느낀다. 그러데 어찌하랴··· 그중 일부는 늦었지만 인생의 방향을 ‘확-’ 바꾸기도 한다.

곽금주 교수는 ‘일 중독’의 원인을 통제중심의 가정교육에서 찾는다. 자유로운 생각과 창조적인 행동보다는 주어진 시간에 더 많은 과제를 수행해 온 것에 칭찬을 받아온 삶의 방식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기쁨과 즐거움, 여유, 새로운 아이디어가 부족하다. 오직 목표만이 크게 보인다.

교회 안에서도 ‘일 중독’은 발견된다. ‘금년 0000명 목표’, ‘한 명 전도, 릴레이 금식기도’, ‘2020년 새성전 입당’ 등의 표어들에 숨이 막힌다. 교회 안에 온통 헌금, 전도 등 ‘목표’만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전한 ‘평강’을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2. 보복 콤플렉스

주로 여성에게서 잘 나타난다. 특히, 남편을 향한 분노와 복수를 자녀에게 쏟아내는 경우다. 다시 말해 남편에게 당한 것을 자녀에게 복수하는 것을 말한다. 자녀를 향해 폭언, 폭력, 학대 심지어 살인까지 하게 된다. 어떻게 자신이 배 아파서 낳은 자식에게 그럴 수 있느냐고 반문하지만, ‘내가 이렇게 당했으니, 다른 사람에게 그대로 행해도 괜찮다’라는 심리에 지배를 당하게 된다. 그게 바로 ‘보복 콤플렉스’다.

평상시 남편을 미워하도록 자녀들을 유도하기도 한다. 흔히 다음과 같은 말을 입에 달고 산다.
‘하는 짓이 네 아빠랑 똑같다’
‘네 아빠 같은 사람과 결혼은 하지 마라’
‘네 아빠만 안 만났어도 내 인생은···’

원인이 뭘까? 남편을 지나치게 의존한 데서 찾는다. ‘의존’은 사랑으로도 표현될 수 있다. 문제는 ‘배신’ 당했다고 여길 때다. 의존한 깊이만큼 상처를 크게 받는다. 받은 상처만큼 ‘보복’해야 한다는 콤플렉스에 시달리게 된다. 간혹 이때 여성은 남편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자녀를 많이 낳는 경우도 있다.

3. 돈주앙 콤플렉스

이는 남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다. 소설 속 바람둥이 ‘돈 주앙’의 이름을 딴 콤플렉스다.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여러 여자를 기웃거리는 남자를 말한다. 단순한 성적 호기심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 콤플렉스에 빠지면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난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만나면 사랑을 구한다. 그 여자를 내 여자로 만든 순간, 싫증이 난다. 그 여자를 버리고 또 다른 여자를 찾아 헤맨다. 이런 일이 반복된다.

학자들은, 남자들이 여성에게서 이상적인 어머니의 모습을 찾으려고 하지만 늘 실패하는 현상이라고 말한다. 유아기 때 어머니의 사랑이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4. 관심 콤플렉스

관심, 인정받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 콤플렉스는 그것이 지나칠 때다. 어린 아이들에게서 잘 나타난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고 어린 아이들이 서로 싸우고, 미워하고, 다툰다. 심지어 살인까지 하게 된다. 동생을 본 5-6세 아이가 갑자기 갓난아기 소리를 내거나 울고, 미운 짓을 한다. 몸에 두드러기가 나오고 실제 머리가 아프다며 두통을 호소하기도 한다. 그래서 둘째 아이 임신을 생각하는 이들은 정말 기도로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

교회에서도 비슷한 예를 종종 본다. 관심을 받으려고 예배 결석하는 이들이 있다. 청장년에서도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다. 회의 중 유난히 반대 의견을 내면서 자신의 존재를 알리려는 이도 있다. 일부러 미운 행동을 하기도 한다. 어린 아이처럼 말이다.

5. 대중 콤플렉스

대중 앞에만 서면 극도로 작아지는 사람이 적지 않다. 평상시 친구들과는 재미있는 이야기도 잘하는 수다쟁이가 여러 사람 앞에 나가서 발표하라고 하면 온 몸이 얼음이 되고 만다. 사회생활에서는 남들 의견에 늘 묻어간다. 회의할 때는 물론 식사 자리에도 자신의 생각은 없다. 그에게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있지만, 발휘할 수가 없다.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사는 게 편하다고 여긴다.

이 콤플렉스에 속하면, 대중 앞에서 극도로 창피함을 느낀다. 자칫 겉으로 ‘겸손’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니다. 심각한 불안에 떨고 있는 중이다. 학자는 이것 역시 원인을 가정에서 찾는다. 자존감을 상실한 가정 교육이 문제라도 한다. 작은 일의 성공 체험을 반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한다.

6. 자아도취 콤플렉스

많은 사람이 ‘나는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출생, 존재, 상황 등은 물론 생각, 결정, 행동 등 모든 것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여긴다. 자신감이나 존재감에 대한 이해라면 문제가 없다. 그러나 ‘위축된 자아’에 대한 지나친 반작용이라면 그것이 바로 ‘자아도취 콤플렉스’에 해당된다. 그는 ‘자기애’ 성향이 강하다. 가족의 이모저모를 유난히 자랑한다. 특히 자식 자랑이 심하다.

이들은 신체적, 사회적, 영적으로 어떠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보다는 그 자체 속에서 만족감을 찾으려고 노력을 한다. 특별한 ‘무엇’이 있기 때문이라고 자아도취적인 모습을 보인다. 이들은 신앙적으로 신비주의적인 성향이 짙다.

7. 노벨상 콤플렉스

완벽주의자가 여기에 속한다. 평범한 성공에 만족하지 못한다. 반에서 1등은 의미가 없다. 전교 1등도 기쁘지 않다. 전국 1등, 아니 세계 1등이라는 지나치게 높은 목표 달성만이 그에게 만족을 줄 뿐이다. 그는 자신에게는 늘 단점만 보이고, 다른 사람에게는 늘 장점만 보인다. 잘난 부모 밑에서 자란 첫째 아이가 여기에 속하기 쉽다.

이상 7가지 콤플렉스를 살펴보았다. 독자께서는 어디에 자신이 속한다고 보는가? 주변 사람들은 어떠한가. 콤플렉스 종류는 이외에도 많다. 남자이길 원하는 여자에게서 나타나는 ‘남성 콤플렉스’, 과거 어떠한 잘못에 대한 죄책감으로 현재의 고통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려는 ‘죄책감 콤플렉스’ 등이다. 한 가지 콤플렉스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하지만, 두세 가지가 복합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필자는 위의 책, <마음에 박힌 못 하나>의 마지막 단락을 읽으면서 적지 않게 실망했다. 위와 같은 콤플렉스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곽금주 교수의 변 때문이다. 서울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그가 한 말이니 신뢰하지 않을 수 없지만, “정말 이 정도 밖에 할 말이 없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필자가 기대를 너무도 크게 한 모양이다. 그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결국 우리에게 해를 주는 그 어떤 것도 내 마음 먹기에 달려 있다. 나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어 나갈 수 있도록 내 마음을 조절하는 것이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다.”(곽금주, p.314)

무슨 말인가? 한 마디로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라’는 것이다. 그게 콤플렉스를 치유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필자는 혹시 내가 놓친 문장이 있었는지 앞뒤로 다시 읽어보았다. 그러나 다른 말은 없다. 그 말 뿐이다. 참···

▲ 이 책은 콤플렉스의 종류를 18가지로 나눠 설명했다

* 성경의 인물들도 콤플렉스가 있었을까?

성경 인물들에게서도 콤플렉스를 발견할 수 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 다윗에게 ‘목욕’이라는 단어는 ‘트라우마’다(삼하 11장). 오늘 같으면 지인의 “우리 목욕이나 갑시다”라는 말에 정신을 잃어버릴 수도 있다. 목욕탕 교제는 그의 사전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유는 과거 한 사건 때문이다. 다윗 왕은 충신인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목욕 장면을 본 후, 일생에 씻을 수 없는 끔찍한 죄를 지었다. 물론 건물 ‘옥상’이 그 트라우마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어느 날 옥상에 올라 간 것이 여인의 목욕하는 장면을 보게 된 전 단계였기 때문이다. 옥상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단어일 것이다.

베드로에게는 ‘꼬~끼오’하는 닭소리다. 닭소리만 들으면 온 몸의 신경이 마비된다. 오늘 우리 같으면 평생 치킨은 먹지 않을 일이다. 왜일까?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한다며 제자로 따르며 수제자로 활동했던 그가 예수님이 공회에서 재판을 받을 때 “나는 그(예수님)를 알지 못하노라”고 3번 부인하지 않았던가. 그 때 닭이 울었다. 베드로는 그 닭소리를 듣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심히 통곡을 한다(마26:69-75). ‘아~ 닭소리’

사도 바울에게도 콤플렉스가 있을까? 있다면 어떤 것일까? 필자는 위 7가지 중 마지막에 언급된 ‘노벨상 콤플렉스’가 그에게 해당되지 않을까 한다. 이유는 그의 지나온 일생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과거 모습을 잘 소개해 주었다. 직접 들어보자.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나는 팔 일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4-6)

사도바울은 한마디로 ‘엄친아’다. 공부 잘 하고, 착하고, 신앙도 훌륭하며 열정적이며 또한 겸손하기까지도 한 사람이다. 사회적, 지적, 신체적 그리고 신앙적으로도 흠 잡을 데가 없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노벨상 콤플렉스’에 빠지기 쉽다. 완벽주의자 성향이다.

이런 그가 변했다. 완전히 변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열정적으로 달려가던 중 다메섹 도상에서 바로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빛이 그를 둘러 비추”었다(행9:3).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후 생각이 바뀌었다. 또한 행동과 비전 모든 게 180도로 뒤집어졌다.

변한 사도바울의 모습이 위 성경 다음 구절부터 나온다. 어떻게 바뀌었는지 성경을 살펴보자.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3:7-9)

사도 바울은 예수 믿음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버렸다고 선언했다. 자신에게 유익하던 자랑까지 모두 배설물로 여겨 버렸으니 ‘콤플렉스-트라우마-열등감’ 등의 단어로 연결되는 그 어두움들은 그 배설물에 묻혀 사라지지 않았겠는가. 다시 태어난 사도 바울의 인생 속에는 ‘예수’ 외에 아무 것도 없게 된 것이다. 오늘 우리도 다르지 않다. 예수 믿음이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로 탄생케 했다(고후 5:17). 다시 말해 다시 태어난 이에게는 콤플렉스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게 핵심이다. 예수 믿음, 그로 인한 ‘거듭남’은 콤플렉스를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바탕이다. 콤플렉스를 품고 살아온 나 자신의 인생이 예수 믿을 때,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렸다.

* 콤플렉스 상황 극복하기

예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난 사도 바울은 분명 변했다. 그의 삶도 변했다. 새로워진 그의 모습을 빌립보서 4장 13절을 통해 살펴보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개역개정)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성구다. 그러나 이 말씀의 뜻을 오해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 성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소위 ‘슈퍼맨’으로 만들어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기도만 하면, 또 하나님께 강짜만 부리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뜻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위 성구 중 ‘모든 것’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은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의 문맥, 즉 글의 흐름을 생각하지 않은 착각의 결과다. ‘모든 것’의 의미를 문맥을 따라 찾아가보자. 바로 위 구절인 12절이다. 한 마디로 ‘풍부의 상황’과 ‘비천의 상황’ 이 두 가지다. 다시 말해 사도 바울은 부자의 상황에서도 자신의 ‘하나님 자녀됨’을 잃지 않은 수 있고, 반대로 가난한 상황에서도 역시 자신의 ‘예수님 사도됨’에 흔들리지 않을 ‘비법’을 배웠다고 강조하고 있다.

‘풍부’와 ‘비천’의 상황은 각각 그에 해당되는 ‘콤플렉스’를 유발한다. 졸부가 되면 사람은 갑자기 거만해 지기 쉬워진다. 종종 사람이 바뀌었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특히 비천의 상황은 더욱 심하다. 매사에 자신감이 떨어지고, 용기가 없으며 구두쇠로 전락되기 쉽니다. ‘돈’에 대해서 다른 사람보다 지나치게 민감하게 반응하게 된다.

위 빌립보서 본문에서 사도바울은 매우 가난해졌다(빌 4:11). 가난뿐만 아니라 지금은 감옥에 갇혀 있다. 모든 것이 바닥인 상태다. ‘엄친아’처럼 모든 것을 갖추고 누리며 살았던 그에게 가난과 감옥은 쉽게 견딜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신의 형편에 대한 극도의 불평과 불안을 호소하든지, 아니면 계속 ‘평안한 척’하면서 고통을 체면으로 참아가든 어떤 식으로든 탈출하고 싶은 신세다. 지금의 사도바울에게는 콤플렉스, 열등감, 트라우마, 자존감 등 어떤 심리적 반응을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그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됐기 때문이다. 생각, 버릇, 반응, 행동 등 모든 것이 이전과는 달랐다. 그는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고 했다(빌 4:12). 모든 것이 사라졌지만, 기쁨과 평안을 잃지 않았다. 그리고 비전도 말이다. 어떻게 해서 그러한 비결을 배웠을까?

사도바울은 같은 성경, 빌립보서 2장 5절-11절을 통해 예수님의 ‘어떠함’을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사도바울의 ‘비결’의 열쇠다. 직접 살펴보자.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5-11, 개정개역)

‘예수님’이 그 핵심이다. 바로 예수님의 ‘어떠함’을 통해 사도바울은 그 비결을 배운 것이다.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또한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지극히 높혀주심도 발견했다. 그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 바로 그것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 늘 기쁘고 평안하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하루하루를 예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게 모든 콤플렉스를 이겨내는 실질적인 방법인 것이다.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은 과거 상처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는 우리의 마음을 은혜로 다스리신다. 그로 인한 콤플렉스도 자연스럽게 치유될 수 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살면 말이다.

이제 눈을 감고 예수님을 다시 한 번 생각하자. 예수님의 마음을 품어보자. 나의 마음을 주님께서 다스려 주시기를 간구해보자. 그리고 그러한 주님의 손길이 나에게만 아니라 우리 이웃에게도 동일하게 임하기를 또한 구하자. 필요하다면 나의 손과 발을 사용하시도록 내어 맡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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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운철 목사의 세상읽기는 매우 희소가치가 높은 글이다. 서적·세상·사회현상 등을 그리스도인의 시각으로 이토록 철저하게 성경적으로 조명해내는 글은 일찍이 어떤 사이트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성도들은 이 글을 통해 세상을 어떻게 보고 살아가야 할지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들도 일독하면 매우 중요한 설교 소재를 얻어갈 수 있을 것이다.

저자 장운철 목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B.A),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Th.M.)를 졸업한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AZUSA PACIFIC UNI.(아주사퍼시픽 대학교, M.A.R)를 졸업했다. 두편의 논문을 작성했다. ‘요한계시록을 오용해 나타난 최근 이단사상 비판’과 ‘An Evangelical Christian Perspective on Money’(언론에 나타난 세상, ‘돈’을 어떻게 볼 것인가?) 등이다. 서울 상도동에서 만나교회(mannagu.onmam.com)를 개척,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저서로는 <신천지 포교전략과 이만희 신격화 교리>(장운철, 진용식, 정윤석 공저, 한국교회문화사, 2007), <그리스도인들이여! 세상을 읽자>(장운철, 솔로몬, 2012), <이단들에 의해 잘못 사용되고 있는 핵심 성경구절 33가지>(장운철, 부흥과개혁사, 2013)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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