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들어가는 말
치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행하신 대표적인 세 가지 사역(가르침, 선포, 치유) 중의 하나이다. 치유는 예수님의 사역의 중심에 있다. 하나님의 치유는 모든 인간의 관심일 수밖에 없다. 어느 시대이든지 하나님의 치유에 대하여 관심을 전혀 갖지 않았던 시대는 없었지만 특별히 오늘날 치유(사역)에 대한 교회의 관심이 많아지고, 신학계에서도 활발한 토의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논의의 배경에는 20세기 초반부터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는 영적 현상과 체험, 치유에 대한 관심과 그것들에 대한 신학적인 성찰이 있다. 또한 현재의 논의는 지난 20세기중반부터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영성, 영적인 삶, 초월자와의 만남, 성숙과 변화와 관련된 치유의 문제에 대한 높은 관심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은 HTM(헤븐리터치미니스트리)사역에 나타난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을 실천신학적인 관점, 구체적으로 ‘사랑의 일치(사랑의 합일, 사랑의 연합)’라는 관점에서 조명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즉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 특별히 그의 설교와 글을 통해 나타난 메시지의 핵심이 무엇인지, 또 그의 글을 읽거나 치유집회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무엇을 경험할 수 있을지를 진단해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예수님과의 사랑의 일치의 관점에서 조명하여 보고자 하는 것이다. 사랑의 일치는 하나님과의 가장 깊은 관계의 수준을 나타내는 개념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란 예수님의 사랑의 마음과의 일치, 예수님의 뜻과의 온전히 일치를 이루는 수준의 관계적인 깊이를 말한다. 즉 이것은 예수님에 대한 신비적인 경험을 하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고, 예수를 따르는 삶에 있어서 예수님의 마음이나 뜻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는 관계 혹은 삶의 수준을 말하는 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맥락에서 HTM을 통한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이 예수님과의 사랑의 일치에 이르도록 성도들을 돕는데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를 고찰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삶과의 일치를 위해 HTM이 보완하거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무엇일지를 찾아보고자 한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을 성찰하기 위해 먼저 그의 신학적인 배경이나 그것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을 간략히 정리할 것이다. 여기서 발제자는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분석이나 성찰에 관하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현요한교수의 입장에 거의 동의함을 밝힌다. 이에 따라 본 발제자는 현요한교수와 신학적으로 동일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실천신학적인(영성신학적인) 관점에서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을 성찰하고 평가하는 방법론을 채택하였다.
II. 손기철 장로의 치유에 대한 신학적인 고찰
1. 성령에 대한 이해와 역할의 문제
손기철 장로는 그리스도교의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의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성령에 대한 이해와 성령의 역할에 대해 전개한다. 그는 “성령님을 어떤 알 수 없는 기묘한 능력이나 에너지로 취급한다든지, 하나님을 돕는 분 정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우리는 성령을 존귀하게 여기고 경배해야 하는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손기철 장로는 성령의 임재를 내주, 성령세례, 성령 충만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손기철 장로에 따르면, “성령님의 내주(dwelling:거주)는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믿고 입술로 고백할 때, 성령님이 우리 속에 거하심을 말한다.” 그러나 성령이 우리 안에 내주하신다고 해서 우리 삶을 온전히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내어드린 만큼만 인도하신다. 그리고 “성령님은 무소부재(편재하심)하시지만 (with us) 특정 장소, 특정 시간에 강력하게 우리를 찾아오실 때(임재하심 : upon us)가 있는데, 이때 우리는 성령세례(성령체험)를 받게 된다. (in us)" 이러한 성령세례를 받은 후에 그 결과로서 성령님이 삶을 온전히 주도할 때를 성령 충만한 상태라고 한다. 성령 충만함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지속적인 충만함이다.
손기철 장로는 성령세례 이후의 성령 충만과 기름부음을 구별한다. 그래서 손기철 장로는 성령의 권능이 나타날 때의 상태를 기름부으심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기름 부으심은 ‘함께 거하심(with us)’과 ‘안에 거하심(in us)’과는 다른데, 그것은 ‘위로부터 임하심(upon us)'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즉 “기름부음으로 인한 권능(power and authority)은 ’우리 위에 임하시는 그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손기철 장로는 이러한 기름부음을 받는 방법으로서,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에 의한 전이(impartation)의 가능성과 이것을 위한 기름부음 받은 사역자의 역할을 강조한다. 안수는 기름 부으심의 전이를 위해 사용되는 중요한 도구인데, 손기철 장로에 의하면, 이것은 ‘마치 발전소에서 전기가 전선을 타고 흘러 들어와 스위치를 올릴 때 전구가 켜지듯, 기도 사역자의 손끝까지 임한 하나님의 권능이 기도 받는 자의 신체에 접촉되었을 때 전기가 흐르는 것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이 접촉점이 믿음이며 전선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기름 부으심 즉 사람에 의한 능력전이에 대해서는 상당한 비판의 시각들이 있다. 첫 번째, 이러한 사람에 의한 능력전이가 과연 성경적인가 하는 것이다. 현요한교수는 성서 속에 능력전이로 볼 여지가 있는 구절들이 있으나(예를 들어, 민 11장 25절, 왕하 2장 9절) 이것을 정형화하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한다. 둘째, 능력 전이에 있어서 인간이 성령의 도구나 통로의 역할을 넘어 주체적이고 주권적인 역할을 할 위험성에 대한 지적이다.
2) ‘하나님 나라’의 개념
손기철 장로의 치유 사역의 기초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차원에 대한 강조이다. 그는 치유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증표로 바라본다. 그러나 손기철 장로는 전체적인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대해, 현재와 미래라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하나님의 통치 주권으로서의 하나님 나라를 함께 이야기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미래적 차원의 약화를 방지하며 균형을 잡는다.
또한 손기철 장로는 하나님 나라 개념을 개인적인 치유에 국한시키지 않고, 사회 공동체적인 치유를 함께 이야기한다. 이것은 HTM의 사역 중 손기철 장로가 중요하게 여기는 킹덤빌더를 세우는 사역에서도 나타난다. 킹덤빌더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고 마음을 새롭게 하여 이 세상에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려는 정신인 “킹덤 멘털리티(kingdom mentality)”를 가진 성도이다. 킹덤 멘털리티는 “이 땅에서 하늘을 쳐다보는 관점이 아니라 (죄인이 의인이 되려고 애쓰는), 하나님 나라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는 관점 (의인이 주의 뜻을 이루려는 관점)”이라고 소개한다. 손기철 장로는 이러한 킹덤 멘털리티를 갖도록 훈련받은 킹덤빌더들은 자신들이 교회가 되어 세상 속으로 나아가 세상에 변혁과 치유를 주도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김영한 교수는 손기철 장로에게서 하나님 나라 개념과 치유의 관계성을 논하면서, 모든 질병이 치유된다고 하는 손기철 장로의 주장은 치유보편주의로서 이것은 그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조에 기인한다고 본다. 하지만 손기철 장로는 분명히 은사중지론에 반대하면서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치유하시며 모든 사람을 치유하시기 원하신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자녀에게 있어서 질병의 문제를 단순한 치유의 문제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차원의 문제로 바라보기도 한다. 치유에 대한 이러한 이중적인 의미는 왕의기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3) 왕의기도 신학
손기철 장로는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연관하여 킹덤빌더들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는 방법으로서 ‘왕의기도’를 제시한다. 손기철 장로에 의하면 “왕의 기도는 이 땅에서 하늘로 오르신 예수님만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령 안에서 이 땅을 바라보며 주의 뜻을 이루는 자가 행하는 기도이다.”
왕의 기도는 선포하는 기도이다. 손기철 장로는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곳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한다고 말한다. 치유 역시 왕의 기도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성경에서 예수님 뿐 아니라 사도들도 이러한 선포를 사용한 예들이 있음을 본다. (행9:40, 요11:43). 그래서 손기철 장로는 치유가 분명한 하나님의 뜻임으로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치유를 선포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왕의기도에 반대하는 자들의 비판은 무엇보다 선포를 해도 낫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경우, 손기철 장로의 주장처럼 기도 받는 자들의 의심과 불신앙 때문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하나님께서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질병과 고통이라는 십자가를 통해서 더 많은 영적인 질병, 교만과 방종을 치유하시고 영적 성숙의 밑거름인 겸손과 인내를 배양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적만을 위주로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전도하는 일은 하나의 영광의 신학,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보다는 초자연적 능력을 행사하는 신을 드러내는 일이 될 수 있다.
III. 실천신학적 차원에서 바라본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
1. HTM 사역에 나타난 손기철 장로의 치유
하나님의 치유(신유)는 손기철 장로의 헤븐리터치미니스트리의 핵심사역이다. 손기철 장로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치유자이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어떤 질병이든지 상관없이 예수님께서 치유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분 앞에 나온 자는 다 치유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HTM에서 손기철 장로의 사역을 통해 나타나는 치유는 어떤 치유인가? 손기철 장로는 성경(마태 4장 23절)을 들어 예수님께서 하나님나라의 좋은 소식을 전하셨고, 우리 영혼의 죄 사함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까지도 치유하시기 위해 돌아가셨음을 지적하면서, 예수님은 우리의 영혼뿐만 아니라 육신의 질병에도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심으로써 우리의 육신의 질병도 치유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오늘날의 교회는 죄와 영혼만을 관장할 뿐 육신의 질병을 치료하는 일과는 무관한 곳으로 전락해 버렸으며, 하나님과 병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다고 지적한다.
마치 ‘영’은 교회에서, ‘혼/마음’은 정신과에서, ‘육’은 병원 내과에서 자기 고유의 분야만을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손기철 장로는 초대교회를 언급하면서 교회는 영혼육 전체를 다루는 곳이지 단지 죄와 영혼만을 다루는 곳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오늘날 현대의학이 발달하면서 육신의 질병의 대부분이 마음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발견했음을 주지시키며 치유는 영혼육의 전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언제 이런 치유(기적)가 나타나는가? 손기철 장로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그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이 녹아지고,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내려놓을 때’이다. 초월자의 존재와 직면하게 될 때인 것이다.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고백했던 베드로처럼 초월자 앞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고수해왔던 우리의 잘못된 생각과 감정과 의지의 행동을 내려놓고, 더 나아가 우리의 자기 자아(거짓 자아, 허구적인 자아)를 내려놓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를 찾아오신다. 성령님께서 찾아오실 때 기적이 일어난다.
기적은 하나님과의 만남이며 하나님과의 만남으로 인해 우리를 치유하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은총이 주어진다. 그 때 무엇보다 변화되지 않던 우리의 마음이 180도로 바뀌게 된다. 마음이 바뀌는 그 순간부터 우리의 삶 역시 완전히 새롭게 바뀌고, 많은 경우 몸의 치유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참고, 잠언 4장 20-23절). 본래 우리를 지으신 그 하나님의 말씀을 품고 그 말씀대로 생각하고 느끼고, 그 말씀을 깨달을 때, 그 말씀이 생명이 되어 우리의 마음뿐만 아니라 몸까지도 건강하게 해주신다는 것이다. 즉 이런 하나님을 만나는 경험을 한 사람들은 자기 몸이 치유되어 기쁜 것이 아니라, 초월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에 감사 감격하며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다고 고백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기적이라는 것이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를 정리해 본다면, 그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의 회복을 통해 죄 용서를 체험하고, 마음이 고침을 받을 뿐 아니라, 몸까지도 치유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거룩한 치유에서 손기철 장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다. 손기철 장로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은 육신이 건강할 수 있도록 그 어떤 질병도 들어오지 못하게 막아내는 길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어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은 우리를 질병에서 치유해 주는 길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은 왜곡된 육신의 사고체계를 벗고 영의 생각, 내 안에 그리스도가 계신 거듭난 사고 체계,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kingdom mentality)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사고방식은 “더 이상 옛날의 육신적 사고방식으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씀을 통하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은 이제 더 이상 내게 속한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이다. 심지어 질병의 문제까지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래서 손기철 장로는 치유사역을 하면서도 만약 “당신이 오직 자신의 질병이 치유되기만을 간구한다면 당신은 아직도 옛 사람의 법, 율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면 질병에 대한 관점이 근본적으로 달라지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약함이 오히려 그리스도의 능력을 머물게 하고, 우리의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을 체험하게 된다(고후 12장 1-10절). 결국 우리의 기도는 자기 자신의 문제와 필요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기도가 된다. 손기철 장로는 그것이 바로 ‘왕의 기도’이며 새 언약, 친 백성의 마땅히 드려야 할 기도라고 주장한다. 이런 의미에서 손기철 장로에게 있어서 마음이 새로워진다는 것은 단지 치유를 위한 하나의 조건이거나 과정이 아니라 그 자체가 치유요, 그것이 치유의 진정한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2. HTM의 치유와 ‘사랑의 일치’와의 관계성: 진정한 치유와 변화의 문제
손기철 장로는 구원받은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갈 2장 20절),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고후 5장 17절)강조한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우리는 이제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우리는 이 세상 가운데 있으나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나’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문제는 더 이상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문제가 된다(고전 6장 19-20절).
손기철 장로는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비록 치유를 위해 기도하더라도 낙심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하나님과의 교제마저 멀어질 것이라고 조언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의 모든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문제 자체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며, 그 문제가 하나님의 뜻임을 알아서 단지 문제만 해결 받기 원하던 기도에서 오히려 그 문제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기도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질병의 문제도 동일한 관점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질병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것은 치유를 포함한 우리의 모든 삶이 자기중심적인데서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삶으로 전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삶이요, 구원을 이루어가는 삶이요,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가족으로 거듭나고 자녀 된 신분으로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삶”인 것이다. 손기철 장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으로 이 세상에서(교회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종교적인 신앙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의 말씀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는 삶이다. 따라서 손기철 장로가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실한 정체성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의 확실성은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 또는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의 문제에 있어서도 초석이 된다. 손기철 장로에게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매우 흥미로운 묘사가 나온다. 그것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 왔으며, 하나님의 씨가 우리 안에 있다’는 성경말씀에 대한 손기철 장로의 설명이다(참고, 요일 3장 19절).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가려고 죽도록 노력을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씨앗이 영혼육 안에서 발현될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발제자가 볼 때 손기철 장로가 말하는 하나님의 씨, 하나님의 DNA는 그 표현이나 이미지에 있어서 존재론적으로 받아들여질 위험이 있다. 개혁신학에서 하나님은 중생한 영혼에게 성령과 말씀을 하나님의 씨앗으로 부여하신다. 구원에 있어서나 하나님을 닮아가는 삶에 있어서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우리 안에 현존하는 성령과 말씀이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나무나 식물처럼, 심지어 동물처럼 태어날 때부터 완전한 존재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세월이 흘러 몸집만 커지면 저절로 성숙해지는 나무나 동물과 같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자라갈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즉 거룩한 세례를 통해 우리에게 임한 성령과 거룩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예수님을 닮은 존재가 될 가능성을 부여받은 존재이다. 우리는 되어져가야 하는(becoming) 존재이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앗,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고,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아무리 주님을 오래 바라보고 그분을 닮아보려고 온갖 노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온전한 모습으로 성숙해갈 수 없다. 손기철 장로의 일관된 사고는 우리의 존재가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의 역사가 나타날 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발제자는 이 여정을 사랑의 일치로의 여정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라 본다. 개혁신학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에게 접붙인바 되어 이미 이루어진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더욱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신비스런) 합일을 온전히 살아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성령의 도움을 받아 더욱 온전한 합일의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 그리고 그의 메시지에 포함된 하나님 나라의 삶은 ‘사랑의 일치’의 개념과는 실제적으로 어떤 관계를 가지는가? HTM에서의 치유의 경험은 ‘사랑의 일치’에 이르는 여정에 어떤 기여를 하는가? HTM의 치유집회에서 사람들은 어떤 영적 경험을 하고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변화를 체험할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손기철 장로의 메시지는 치유사역에 참여하여 그의 설교를 듣거나, 그의 글을 읽는 독자들이 그리스도인 안에 있는 자신의 참된 정체성을 확실히 체험하여 알고, 하나님의 나라의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단지 인지적으로 깨닫는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치유를 통하여 실제적으로 경험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핵심을 체험적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치유집회에 참여하여 설교를 듣고 치유를 경험하면서 갖는 내면의 체험, 더 나아가서 내면의 변화, 혹은 회심은 어느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변화의 체험일까? 비록 그들이 진정으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삶의 중심에 오는 은혜의 체험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매우 제한적인 체험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손기철 장로의 메시지와 글, 치유(또는 변화, 회심)집회를 통해 기대되는 변화는 도덕적인 차원의 회심(변화)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도덕적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차원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인 차원의 회심이나 변화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은총에 의한 변화인데, 하나님 안에서의 가치관의 근본적인 변화 또는 우선순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확실하게 떠나는 것이라든지, 주님을 만난 베드로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며 자기가 가진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려두고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하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새로운 가치관을 따라 살아가게 되는 삶의 결정적인 변화를 하는 것이다. 도덕적인 회심은 더 이상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니라 주님이 중심이 되고, 주님의 가치를 따라 살아가는 삶으로의 변화이다. 비록 이것이 주님의 은총에 의한 변화, 주님 안에서의 변화이지만 특별히 가치관에서의 변화가 두드러진다고 해서 도덕적인 회심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인 차원의 변화는 보다 더 깊은 주님에 대한 앎과 주님 안에서의 변화로 나아가야 한다. 그 변화란 정서적이고 인지적인 차원에서의 변화를 말한다. 실제로 우리가 주님의 가치를 따르기로 작정하는 도덕적 회심을 경험했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완성이 아니라 도전일 뿐이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다. 현재의 자기와 되어져야 할 자기를 인식하는 수준인 것이다. 이러한 간격을 극복할 수 있도록 베풀어 주시는 은총이 바로 주님과 사랑에 빠지는 경험인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은총을 더욱 깊게 체험하여 주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더욱 온전히 알고, 주님과 더 깊고 친밀한 사귐의 관계로 나아가기 위해 은혜를 구하며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며 끊임없는 훈련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은총으로 우리를 주님의 사랑으로 변화시켜주시며, 주님이 어떤 분이심을 확실히 알게 하시고, 주님의 마음으로 우리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며 인식하는 인지적인 차원의 회심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실 것이다.
궁극적으로 우리는 요한복음 21장에 나온 베드로처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체험하여(로마서 8장의 바울의 모습이 더욱 적절해 보임) 그 사랑 안에서 우리의 삶의 완전한 재 정향, 주님이 완전히 우리의 중심이 되셔서 사랑으로 오직 그분만을 따르는 소위 종교적인 차원의 회심으로까지 나아가야 할 것이다. 사실 이 모든 변화는 한 사람 안에서의 변화이기 때문에 그 변화를 단계적으로 설명하거나 각기 따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변화되고 그분이 우리의 중심에 오고, 그분만을 따르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갈 것인가이다. 다시 말해 HTM의 치유사역이 그러한 변화와 성장으로 인도하는가, 혹은 그러한 성장을 지향하며 치유의 사역을 실천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강조가 부족한 문제
HTM의 치유사역은 성도들이 주님을 알고, 그분과의 사랑으로 온전히 하나 되며 그 사랑 안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하는 제자의 삶으로 나아가도록 안내하는가? 어떻게 HTM의 치유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사귐의 단계, 즉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여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게 할 수 있을까? 이런 성장으로 나아가는 은총의 길은 한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당신에게로 이끄시는 은총의 길은 무수히 많다.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선포되는 설교와 저서들)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친밀한 관계로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살펴볼 때, 또한 기독교 교회 전통의 다양한 영성훈련이나 영적 가르침들과 비교해 볼 때 뚜렷하게 드러나는 것은 성령에 대한 강조이다. 그의 메시지 속에 성령님을 뜨겁게 갈망하고, 그분과 교제하면서 인도를 받고, 성령의 도구가 되며, 우리를 통해 성령이 나타나는 삶을 열렬히 구하는 것이다. 그가 저술한 책 가운데서도 가장 많은 관심과 비중을 두고 저술한 주제가 바로 성령과 관련된 것이다. 손기철 장로의 신학에 대해 논란이 되는 부분들도 주로 성령과 관련된 것들이다.
반면에 손기철 장로의 많은 글이나 설교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인성)에 대한 언급이나 강조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예수님의 어린 시절, 공생애 이전의 삶, 공생애, 그리고 수난과 부활 등, 예수 그리스도의 전 삶과 그분의 존재, 예수님의 성부 성령 하나님과의 관계, 그분의 신앙, 그분의 의미, 그분의 부르심과 소명의 완성. 우리가 예수님과 어떻게 관계를 맺고, 그분 안에서 자라가며, 그분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따라갈 것인지에 대한 섬세한 가르침이나 설교도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것은 손기철 장로의 글이나 설교 속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거나,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신앙이나 치유 사역에서 중심이 아니라는 말이 아니다. 그의 치유사역을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치유기도』를 보면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인 것을 볼 수 있다. 이 책의 구조와 내용을 보면, ‘치유자는 오직 예수님’(1장)이시며, ‘예수님의 영으로 새로운 사고 체계’(2장)를 이루며, ‘우리의 마음을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께 드리라’(3장)고 한다. 또한 ‘치유자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분의 이름을 높일 것’이며(4장), 마지막으로 ‘예수님께 뿌리박고 예수님만 의지하라’(5장)고 권고한다.
손기철 장로의 전체적인 사고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분명히 있다. 그러나 예수님에 대한 제시가 단지 치유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또한 예수님으로 하여금 예수님의 삶을 살게 하셨던 성령님께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다. 성령님께 초점을 맞추거나 관심을 두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 자체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다. 즉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친밀하게 알아가며, 주님과의 관계가 깊어지고, 그 사랑의 관계 안에서 보다 더 깊은 차원의 변화와 치유로 나아가고, 그리하여 마침내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로 나아가게 하는 섬세한 안내는 희박해 보인다.
전체적으로 볼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을 강조하면서 성령님의 도움으로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고, 주님께 우리 자신을 내어드리며,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의 이름을 높이며, 그분만을 의지하도록 안내하고 있다. 물론 우리가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님을 알 수도 없고, 예수님 안에서 살아갈 수도 없다. 그러나 이 모든 예수님에 대한 언급들이 예수님 자체에 대한 관심, 주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와 관계 안에서의 성숙, 제자도에 대한 관심이라기보다 치유에 맞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HTM의 치유사역이 단순히 주님을 만나 몸과 마음이 치유를 받는 수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삶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성도들을 안내하기 위해서, 더 나아가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보다 온전한 치유와 변화의 은총을 덧입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치유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배우기 위한 진지한 노력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걸으면서 친밀하게 그분을 알아갈 때에만, 그분의 사랑과 존재로 우리의 전 존재가 그분의 사랑으로 치유되고, 사랑으로 하나 되며, 그분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4. 영적 체험과 분별의 문제: 하나님의 은혜와 심리적인 체험의 관계성
우리의 신앙생활 속에 다양한 하나님의 은혜들(또는 은혜의 체험들)이 주어진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무엇을 경험하든 경험하지 못하든 실제적으로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은혜(순전한 은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또한 그것들로 인해 경험되는 영적체험들(심리적인 경험들)이 있는데, 그것들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순전한 은혜와 다양한 영적(심리적인) 경험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에 이르게 하는데 어떻게 기여하는가를 잘 분별해 내는 것이다.
손기철 장로는 치유집회에서 치유의 경험,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감정과 느낌의 체험”을 매우 중요시한다. 실제적으로 그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성도들을 안내한다. 문제는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대한 “감정과 느낌의 체험”들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로 인도하는 것이다.
신앙생활 속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부분을 어루만져 치유해 주시는 체험, 감정적으로 느껴지는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 또한 우리의 이성과 감성, 기억과 의지를 가지고 주님을 묵상할 때 그분을 깨달아 알면서 깊어지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 이 모든 것은 매우 소중한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들이다. 이 모든 것을 통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당신께로, 당신과의 더 깊은 관계 속으로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실제적으로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성경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고 그분을 따르기 위한 공부와 묵상이 중요하다. 그리고 주신 깨달음을 붙잡고 의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하나님을 더 잘 알고 그 분과 깊게 교제하기 위하여 우리의 상상력이 거룩해지고, 우리의 감정을 정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지성적으로 깨달아지고 감성적으로 느껴지는 경험에만 하나님의 현존과 그분의 은총을 제한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의 영적 체험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감각적으로 느껴지고, 지성적으로 파악하여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감각적인 체험만으로 포착되고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며 느낄 수 있는 분으로 다가오시지만, 우리의 감각 너머에 계시는 초월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적 체험이 유익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감각적 체험들 자체와 또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
주님과의 사랑의 일치로 나아가고자 하는 우리의 영적 여정에서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가 우리에게 항상 주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순전한 은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우리에게 거저 내어주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의 자녀로 선택하여 주셨을 뿐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시면서 우리로 그 사랑에 응답하여 우리도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온전히 내어드리는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하신다. 즉 하나님은 우리가 인식하건 인식하지 못하건, 우리 안에서 지속적으로 당신을 내어주시는 역사를 펼치시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는 항상 느껴지는 체험으로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전혀 깨닫지 못하는 방법으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다. 그 은혜는 끊임없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그분의 함께 하심을 깨닫고, 그 하나님의 임재와 사랑에 우리를 굴복시켜 마침내 사랑의 일치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이러한 순전한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질 때, 그것을 심리적으로, 감각적으로 체험하는 경우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심리적인 경험과 하나님의 순전한 은혜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하자면 심리적인 경험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판단해서 안 된다는 것이다. 느껴지는 것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제한해서 안 된다. 느껴지는 것보다 훨씬 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역사하고 있음을 항상 유념해야 한다. 심리적으로 대단하게 느껴지는 감각적인 영적 체험들은 영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수준에서도 얼마든지 경험된다. 그러므로 그러한 영적 체험을 한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과 진정으로 성숙한 관계를 보여준다고 말할 수 없다.
치유의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몸의 치유는 하나님의 은총의 선물인데, 하나님은 다양한 수단을 통하여 우리의 아픈 몸을 고쳐 주신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의 몸만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고쳐주시고, 하나님의 거룩한 치유의 손길이 필요한 부분이라면 우리 존재의 그 어떤 부분이라도 고쳐주신다. 무엇보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사랑의 일치에 이르기 위해서는 우리의 몸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특히 우리의 무의식의 깊은 차원에서 정화와 치유의 은총이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과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우리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변화되어져야 한다. 그러한 내면의 변화가 주어질 때 손기철 장로가 언급하듯이 우리는 해결되지 않는 우리의 그 어떤 (육체적인) 질병일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깨달으며, 오히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예수님은 우리의 치유자이시며, 오늘도 연약한 우리 인간들을 치유하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병을 고쳐주심을 체험할 때 우리는 우리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하심과 그분의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을 새롭게 할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HTM의 치유사역에서 경험되는 것들 가운데 많은 치유의 경험들은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들이다. 이처럼 모든 치유를 하나님의 치유의 손길로 바라볼 때, 동시에 우리는 너무나도 쉽게 예수님의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놓칠 수도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님의 치유는 당대의 그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치유를 예수님께서 행하셨다. 그 어느 누구도 소망할 수 없고 고칠 수 없는 것들을 주님께서는 사랑으로 온전히 치유하신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 어떤 종류의 치유이건 진정한 예수님의 치유가 오늘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은혜의 경험이든지 그것이(즉 그 치유의 경험이) 우리로 하여금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나아가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영적 체험들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신유의 체험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는가? 혹은 전혀 깨닫는 것도 없고, 아무 것도 느끼지도 못할 때, 즉 어떤 영적 체험도 전혀 주어지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HTM에서는 성도들이 많은 영적 체험을 하고,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그런 체험을 원하여 그곳을 찾기도 한다. 실제로 손기철 장로는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와 치유의 체험을 할 수 있도록 안내하기도 한다. 체험은 얼마든지 다양하게 주어질 수 있다. 우리는 체험을 어떻게 분별해야 하는가? 그 체험의 분별을 위한 기준은 무엇인가? 다양한 체험의 식별을 위한 지침은 또 다른 논문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사랑의 일치라는 신앙의 근본적인 목적에 비추어 영적 체험에 있어서의 분별의 기준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체험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게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자기중심성에서 예수님 중심으로 나아가게 하는가, 궁극적으로 예수님과의 사랑의 합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급진적인 회심으로 우리를 인도하는가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나가는 말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은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일부는 HTM의 치유사역을 상당히 비판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HTM의 치유집회를 찾고, 손기철 장로의 설교를 듣고자 하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체험하기를 원해서 일 것이다. 치유를 통해 오늘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의 은혜를 체험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발제자가 볼 때)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도들에게 호소력을 갖는 제일 큰 요인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확실히 체험할 수 있게 해주는데 있다고 본다. 복음의 진정한 핵심,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자신의 정체성을 확실히 깨닫게 되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하나님 아버지와 교제하는 풍성한 은혜의 삶”을 살아가도록 안내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성도들로 하여금 담대하게 치유를 위해 기도할 수 있는 이유이고, 이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의 삶과 킹덤빌더로서의 삶의 기초가 된다. 치유사역을 통해 성도들이 경험하는 하나님과의 만남과 하나님의 활동하심에 대한 체험,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의 회복을 강조하는 손기철 장로의 메시지는 오늘날 HTM의 치유사역이 한국교회에 줄 수 있는 큰 기여라고 생각한다.
HTM의 치유사역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한국교회 안에서 견고하게 뿌리내리고 발전하기 위해서 발제자가 생각할 수 있는 제안점이라면 HTM의 치유사역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일치적인 삶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으로 주님과 하나 되어 주님을 섬기는 삶이라는 전체적인 신앙의 전 여정 혹은 틀 가운데 사랑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하게 방해하는 모든 것들-영혼육, 의식과 무의식-이 정화되고 회복되는 은총의 경험으로 치유를 이해하는 틀이 필요하다. 이렇게 치유를 꼭 필요한 하나님의 은총이면서도 포괄적인 차원으로 이해할 때 치유사역이 건강하게 교회 안에서 자리하게 되리라 본다. 물론 예수님의 삶과 온전히 일치하게 하고자 하는 그러한 비전과 방향성이 손기철 장로의 글들 속에 분명히 반영이 되어 있다. 하지만, 실제로 성도들이 치유나 현상적인 경험에 집착한다면 치유는 하나님의 은총의 경험일 수 있으나 그것이 하나님과의 사랑의 일치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음을 심각하게 고려해야 할 것이다.
발제자는 손기철 장로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에 대한 강조는 동의하나 많은(대부분의)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이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희박하다거나 성령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는 주장에는 조금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이 분명하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분명한데, 아직도 우리 안에 자기중심성이 강하게 뿌리박혀 있다는데 있다. 자녀이지만 자기중심주의와 이기심, 세속적인 마음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HTM에서나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대단한 영적 경험을 하더라도 쉽게 극복되지 않는다. 은혜를 받는 순간에 자기를 내려놓을 수 있게 되고 변화를 체험한 것 같으나, 근본적인 내면의 변화를 경험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되지 않은 모습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주님을 향한 여정을 걷기로 결단하여 출발했어도 신앙의 틀이 갖추어져 가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변화되지 않은 내면의 모습이 고착되어 하나님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중심적인 신앙의 삶을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 안에 있는 존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존재이지만, 완전히 변화된 존재는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사랑의 일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은 존재, 자녀로서의 정체성은 확실하나 여전히 하나님의 은혜, 성령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이 영원토록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들인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겸손하게 긍휼의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손기철 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판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발제자가 볼 때 심리적인 요인도 상당히 작용을 한다고 본다. 물론 서로 다른 신학적이고 신앙적인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손기철 장로의 신앙이나 신학이 기독교의 기본적인 신앙고백이나 뿌리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으로 간주하여 신학계에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이러한 신학적인 반대보다도 더 치명적으로 보이는 것은 다른 신앙(의 모습)이라고 끊임없이 양자 간에 비판을 하니(HTM의 치유사역을 반대하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손기철 장로의 글이나 설교에서도) 서로를 향한 비판과 갈등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이다.
앞으로 HTM의 치유사역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더욱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HTM은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의 비평을 귀를 기울여 듣고 끊임없이 교회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신학적인 부분은 다루지 않았지만 발제자는 개인적으로 추후에 신학적인 다름과 그 다름에 대한 토의가 우리를 훨씬 풍성하게 하고 견고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
사도바울이 말씀하셨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지켜 나간다는 마음, 한국교회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열린 대화를 하면서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가 활발하게 일어나는 한국교회, 건강한 교회를 세워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