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글에서 저는 기독교학술원의 요청대로 첫 번째는 오방식 교수의 발제문에 대해서, 두 번째는 그 동안 사역에 있어 비판과 권면을 받아온 부분들에 대한 본인의 견해와 입장을 밝히고자 한다. 후자를 위해서는 주로 현요한 교수의 기독교학술원 발표 소논문, 박영돈 목사의 “일그러진 성령의 얼굴”, 그리고 김영한 교수의 “영적 분별” 책에 나온 저에 대한 평가를 주로 참고하였다. 저의 견해와 입장을 밝히기 전에 먼저 서론에서 간략한 HTM 역사와 저의 몇 가지 신앙적 소견 및 전제들에 대해서 알리고자 한다.
I. 서론
1. HTM 사역 배경
지금까지 하나님께서는 저에게 세 가지 소명을 주셨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는 1999년에 치유사역에 대한 것이고, 두 번째는 2005년에 하나님나라의 복음에 대한 것이고, 세 번째는 2008년에 교회를 통한 사회변혁에 대한 것이었다. 저는 현재 대학(건국대 보건환경과학과)의 교수로서, 교회(온누리교회 이재훈 담임 목사)의 장로로서, 또한 HTM(헤븐리터치 미니스트리)이라는 선교단체를 이끌어 가는 대표로서 지금까지 주님이 허락하신 자리에서 주님의 때에 주님이 시키시는 일을 하고자 애써 왔다.
지금까지 주신 세 가지 소명에 입각해서 2004년부터 2007년까지는 온누리교회 내 치유사역위원회에 소속되어 “월요치유집회”를 인도해 왔다. 2007년 후반기에는 매주 전국에서 3,000명이 넘는 성도들이 교회로 찾아 왔기 때문에 교회 행정 및 목회적으로 그리고 주위 지역 주민들과의 관계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로 교회에서는 이 사역이 한 교회의 사역을 넘어서는 것으로 판단하고 한국교회 전체를 섬기도록 권유함으로, 이에 따라 한국독립교회 및 선교단체연합회(KAICAM) 소속의 Heavenly Touch Ministry(헤븐리터치미니스트리, 이하 HTM)이라는 선교단체가 발족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2008년 2월부터 성남 복정동에 위치한 선한목자교회(유기성 목사 시무)에서 2014년 9월까지 “월요말씀치유집회”를 이끌어 왔다. 또한, 행정, 세미나 및 스쿨, 기도사역을 위해서 청담동 휴먼스타빌 2-3층을 전세로 입주하여 지난 5년간 센터를 운영해 왔다. 그리고 마침내 2015년 2월 14일 신대방동 보라매공원과 병원 옆에 위치한 주상복합건물의 지하 1층에 “헤븐리터치센터”를 마련하여 집회와 센터 행정 및 사역을 함께 하고 있으며, 매주 화요일 공개적인 “화요말씀치유집회”를 이끌어 가고 있다.
2. 말씀 선포와 집필 내용의 편향성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저의 사역과 말씀선포 그리고 집필 내용의 편향됨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 언급하고자 한다. 지금까지 지적된 내용의 주된 이유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 번째는 지난 사역을 되돌아 볼 때 소명에 따라 그동안 치유사역을 해왔기 때문에 말씀의 전파와 가르침 그리고 사역 자체가 치유에 집중되어 있음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또한 비교적 최근에 발간된 킹덤북스 시리즈 [알고 싶어요 성령님]과 [킹덤빌더](이상 규장),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이상 두란노)]를 제외한 지금까지 나온 대부분의 책들은 목적한 바대로 치유와 회복, 성령과 믿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두 번째는 한 성도로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존 기독교 내의 귀중한 가르침은 당연시 했으며, 그에 대한 귀한 책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사역을 시작하면서 신학교에서나 교회에서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실제 신앙생활에서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부분들에 대해서 강조하고 더 나타내려고 노력해 왔다. 따라서 혹자가 평가할 때는 나의 신학이 균형잡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고 본다.
세 번째는 처음에는 주님이 주신 치유사역의 소명에만 국한되었지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과 신학에 있어 그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균형 잡혀 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간 전 세계를 다니며 집회를 하면서 수많은 분들을 만났고, 그분들로부터 삶과 신앙 그리고 신학을 듣고 배우게 되었다. 특별히 근년에 들어 몇 분의 신학자분들과의 교류 및 올해부터 김영한 교수를 통해서 기독교학술원과 관계를 가진 것도 저의 신앙과 신학 그리고 사역에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생각된다.
과거에 저의 사역과 신학에 대해서 논평을 하신 분들은 대부분 저의 초기 집회와 저술에 기초하였지만, 오늘 발표하시는 오방식 교수의 경우는 저의 최근 집회와 저서에 기초하여 보다 정확하고 균형 있는 평가가 이루어졌다고 본다. 오방식 교수가 저의 사역과 신학에 대해서 논하신 글 중에서, “손기철장로는 구원받은 자들이 하나님 나라 복음의 관점으로 이 세상에서(교회 안이나 밖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종교적인 신앙의 삶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이루어진 약속의 말씀이 이 땅에 실체로 나타나는 삶이다. 따라서 손기철장로가 계속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확실한 정체성이다”. 그리고 “손기철장로의 일관된 사고는 우리의 존재가 철저하게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씨앗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의 역사가 나타날 때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변화되고,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드러난다는 것이다”라는 표현이 저의 신앙적 노선과 신학적 관점의 중요한 골격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본다.
3. 성령사역의 배경
HTM에서 주장하는 하나님나라의 신학은 신사도개혁운동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물론, 처음 성령체험을 하고 주신 비전을 이루어가는 동안에 국내외 많은 집회를 다녔고, 다양한 성령사역자 및 치유사역자들의 설교를 들어보고 기도를 받은 것도 사실이다. 또한, 초창기에 성령과 치유에 대한 수많은 책들의 내용을 제 경험에 비추어 수렴하는 가운데 충분한 검토없이 어떤 교파나 운동 등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사용하거나 인용한 것도 사실이다. 누구든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하거나 알려지지 않는 일들에게 대해서 말하거나 기술할 때 이미 사용되어지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 후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서 확증된 것뿐만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새롭게 조명된 내용을 신학적으로 정리를 해나갈 때 인용된 내용을 가감하거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내용이나 용어를 점차적으로 재정리하고 있다. 이러한 내용은 처음 쓴 책인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의 개정판을 통해서 이미 기술하였다. 앞으로 훌륭한 신학자 및 목회자와 더 많은 접촉과 토론을 통해서 한국에서 특별히 취약한 부분인 성령사역과 치유 및 은사 사역의 신학적 이론과 실천적 모델을 정립해 나가고 싶다.
II. 본론
1. 성령사역에 대한 비판과 판단의 기준
성령사역에 대한 오해와 몇 가지 일들에 대해서 함께 나눔으로써 이 땅에 도래한 하나님나라가 더 확장되기를 소망한다. 나타난 현상만을 보고 사역을 판단하거나 그 사역자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말씀사역은 사람을 점진적으로 변화시키지만 말씀과 성령사역은 눈에 띄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동반하기 때문에 늘 시험의 대상이 되었고,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이러한 일들은,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귀신을 쫓아낼 때 바리새인들은 바알세불의 짓이라고 단정했다(마 12:22-37). 따라서 우리는 사역과 사역자를 판단할 때 현상만을 보고 판단하기 전에 적어도 다음과 같은 사항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1) 서로 열린 마음으로 보려 하는가?
어떤 신앙을 이해하고 판단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이라는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그 주장이나 신앙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을 이루게 하는가? 그 결과로 일상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더 나타나게 하는가? 하나님나라의 회복과 그 복음 전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가 등으로 판단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소속된 교단이나 교파 또는 자신들이 추종하는 주의(主義)로 본다면, 결국은 자신의 입장에서 수용되지 못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부정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다른 말로 자신이 속한 교파나 교단이 지지하는 주의의 관점을 지키거나 지지하거나 보호하기 위한 비판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자신이 선택한 신학적인 체계(주로 전통과 합의된 정통)에 맞는 성경의 말씀을 이용하여 자신의 주장에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이단으로 보는 식의 바리새주의적 태도는 이제 사라져야 한다. 우리는 서로 권면해야 하며, 서로 조심해야 하며, 서로 배워야 하며, 그 결과로 더 많은 불신자들이 돌아오고 믿는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확장되도록 해야 한다.
2)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하는가?
각자에게는 주어진 비전과 소명이 있다. 그리고 교회나 사역 단체들은 그것에 따라 최선을 다해 섬기고 있다.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에 따라 목회철학이 다르고, 지향하는 바가 다르다. 사역단체도 마찬가지이다. 같은 그리스도안에 있지만 선교대상이 다르고, 주의 나라를 이루기 위한 섬김이 다르고, 방법과 수단 또한 다르다. 그렇다고 해서 가장 근본이 되는 삼위일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예수님의 그리스도와 주되심, 십자가와 부활 등을 무시하거나 편향된 시각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기본이 잘못되었을 때 우리는 이단이라고 부르게 된다.
각 사역단체가 자신에 주어진 비전에 따라 그 일을 행할 때 우리는 그 사역단체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예를 들어 많은 사역 중에 하나님께서 HTM에 치유사역의 소명을 주시고 그 일을 행하도록 하셨을 때, 저희 사역단체의 집회나 주장이 치유사역에 한정되어 있다고 해서 왜 구원복음이나 고난복음을 선포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는가? 사실은 그 일은 기존 교회에서 온전하게 해야 할 일이 아닌가? 만약 특정 사역단체가 그 단체의 비전에 따라 움직일 때 균형잡히지 않았고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한다면, 거꾸로 그 비난한 당사자는 그 사역단체의 사역을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난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3) 어떤 태도로 보아야 하는가?
어떤 사실이나 문제를 비난할 때는 매우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만에 하나 잘못된 판단을 할 경우, 그로 말미암아 본의 아니게 당사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줄 수 있고, 자신 또한 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사회에 있어서도 재판을 할 때 어떤 사람의 죄가 완전히 입증되기 전에는 최대한 그 사람을 보호하고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사회법의 통례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다른 사람을 판단할 때는 너무나도 비상식적인 일들을 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신학자들이 인터넷에 떠도는 출처가 없는 내용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조사나 확인도 없이 인용하는가 하면, 수천 건의 치유간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치유에 대해 부정적인 한두 사람의 증언을 토대로 그 사역의 열매 전체를 잘못된 것으로 매도하고 있다. 더욱이, 자신이 경험해 보지도 못한 일을 다른 사람의 간증을 통해서 판단하는 이러한 행태야 말로 극단적인 환원주의적 태도이며, 하나님의 법은 커녕 사회법조차도 지키지 않는 독선적이고 의도적인 주장일 뿐이다.
4) 어떤 판단의 기준을 가져야 하는가?
기독교의 신앙은 처음도 믿음이고 끝도 믿음이다(롬 1:17). 복음 자체가 신비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에 따른 표적은 현재의 세상적인 관점, 현실적인 관점, 물리적인 관점에서 볼 때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과학적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판을 위한 비판자들은 신유사역을 통해서 나타난 모든 일들은 믿음에 의해서가 아니라 과학에 의해서 입증되어야 한다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치유가 주의 말씀을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 또한, 지금의 현대 의학으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은 믿지 않겠다는 관점을 견지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영역에서 일어난 사건들을 이성과 과학적 논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는 것이 과연 정당한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반대로 사역의 열매들이 오직 인간의 이성과 논리와 과학으로 설명되어지는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신비한 하나님의 영역에 속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신유사역 시 믿음을 통해서 치유받았다는 사람 중에는 치유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리적인 느낌, 자기 최면적 믿음, 거짓으로 간증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의사나 신학자나 목회자가 치유되었다고 간증하는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우리는 수많은 간증자 중에 거짓된 것을 찾기 보다는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치유될 수 있을까에 집중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이 아닐까?
5) 누가 권면하고 비판할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나 사역단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영적인 일들은 말씀과 열매로 판단해야 하며, 영적인 사람에 의해서 판단받아야 하며(고전 2:14), 그리고 영적 변질을 막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감독해야 한다고 본다. 실제로 성령사역시 나타나는 현상과 행하는 것이 정말 성령님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악령에 의한 것인지는 영적인 사람에 의해서 판단되어야 한다. 실제로 귀신들린 자는 귀신뿐만 아니라 성령님도 알아본다. 반대로 성령에 사로잡힌 자들도 성령님뿐만 아니라 귀신들린 자도 알아본다. 왜냐하면 둘 다 영적이기 때문이다.
한편, 비판을 위해 비판하는 사람들은 진정한 성령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자신은 성령사역을 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의 사역을 비판만 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질뿐만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으로 비춰질 수 있다. 비판만 하거나 잘못되었다고 비난하기보다는 올바른 사역이 무엇인지를 보여 주고 권면하여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사역자들이 회개하고 돌이킴으로 주의 나라가 확장되지 않겠는가?
6) 무엇을 보아야 하는가?
(1) 기사와 표적의 온전한 의미를 보아야 한다. 사역에서 나타나는 기사와 표적의 중요성은 특별한 능력을 나타내는 사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나라의 도래를 나타내는 징표로서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사역시 기사와 표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고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나라로 침노하여 그의 의를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도록 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거나 말씀대신 자신의 경험담이 주를 이루는 사역자는 매우 경계해야 한다.
(2) 나타난 현상만으로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 나타난 대부분의 현상들은 성령님 자체의 나타남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인한 인간의 죄악이 드러나고 인간을 사로잡고 있는 악한 영들이 나타내는 현상들이 대부분이다. 성령님은 거룩하시고 영화로우시며 사랑이신 말할 수 없는 평강을 주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나타난 현상은 그분이 나타내시는 현상이 아니라 상처와 쓴뿌리를 지닌, 악한 영에게 묶여있는, 여러 가지 일들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육신에 그분이 임하실 때 우리 인간이 나타내는 또는 우리안에 있은 악한 영이 나타내는 현상이다. 사람들은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성령님이라면 어떻게 이런 현상이 나타날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한다. 실제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에 의해서도 반대로 악한 영의 발악에 의해서도 사람들이 얼마든지 쓰러지고 뒹굴 수 있다.
(3) 사역자 자신을 신격화시키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를 통해서 그분의 통치권을 행사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마치 놀이처럼 여기는 사역자도 있다.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자신의 능력인양 과시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그 사람의 행동 때문에 성령을 거부하거나 훼방하는 죄를 범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성령사역을 할 때 정말로 주님을 영화롭게 해야 하며 우리의 잘못된 처신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단지 하나님 영광의 통로로 쓰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온전치 못하기 때문에, 영적 공동체 안에서 그리고 다른 사람의 권면을 받지 않으면 교만해지고 우상화될 소지를 가지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많은 선한 성도들을 실망시키고 그들로 인하여 하나님이 모독 받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령님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령사역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말씀사역을 하시는 유명한 목사라 할지라도 그분이 온전한 내적치유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지 못할 경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지 않는 영향력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그 사람이 전한 말씀이 다 악한 영에 의해서 조정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4) 성령사역이 십자가에 기초하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경우 십자가의 도에 기초하지 않는 성령사역에 대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아 왔고, 그 결과로 하나님이 베푸신 기사와 표적을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지 못하는 경우들을 많이 보아 왔다. 그러한 일들로 인하여 성령사역을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뿐만 아니라 심지어 왜곡된 복음관을 가지기도 했다.
그리스도인의 죄 사함은 십자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실제 자녀의 하나님나라의 삶은 부활과 오순절날의 성령강림과 같은 성령체험을 통해서 시작된다. 온전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그 기초와 중심에 십자가가 놓여 있어야 한다. 성령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영적 전쟁은 십자가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믿음을 통한 우리의 연합, 내 안에 계신 성령님, 성령의 인도로 인한 십자가에서의 육체적 죽음, 의의 병기를 통한 성령의 나타나심에 대한 기초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십자가에 기초하지 않는 성령사역은 마귀에게 틈을 주게 되고, 잘못된 길로 갈 확률이 매우 높다.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연합되고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성령의 임재하에서가 아니라, 그 성령의 임재 가운데서 십자가를 볼 때이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볼 때 우리의 나이, 직업과 신분, 교단과 교파를 떠나서 성령 안에 하나가 될 수 있다. 그때 하나가 되며 영적 부흥이 일어난다.
2. 논란이 되는 신학적 문제에 대한 견해
1) “왕의 기도”라는 용어
왕의 기도는 예수님의 기도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님과 같은 기도를 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만든 용어이다. 현요한 교수나 김영한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기도보다는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연 선포냐 기도냐 아니면 선포기도냐에 대한 재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러한 선포가 하나님의 자녀의 삶에 필요하며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한다면, 그 용어는 신학적으로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바꾸어도 하등 문제시 될 것이 없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자녀의 선포”나 “킹덤빌더의 선포”가 좋다고 본다. 신학적 공감대가 형성되면 앞으로 용어를 바꾸어 사용하겠다.
2) 성령의 역사와 기름부으심에 대하여
가장 먼저 집필한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책에서는 성령의 임재를 내주, 성령세례, 성령충만으로 나누어 설명했다. 그러나 그 후 개혁주의적 복음주의와 오순절/은사주의의 성령론에 관한 책들과 신앙의 선배들의 경험들 그리고 저의 개인적인 체험을 토대로 하여서 새로운 관점을 “알고 싶어요 성령님”에 기술하였다. 중생할 때 임하시는 성령님의 내주를 성령세례로, 성령이 내주한 자에게 위로부터 성령님이 임하시는 것을 “성령체험”이라 정의하였고, 성령체험의 결과로 지속적으로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 상태를 “성령충만”이라고 하였다. 성령세례와 성령체험은 동시적일 수도 있으며, 많은 경우 성령세례 후 성령체험을 갖게 된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와 은사/능력의 나타남은 성령의 다른 역사가 아니라 한 성령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모두 세례 후 성령체험을 통해서이며, 그것은 심령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의 혼과 육을 실제적으로 통치하시는 것을 경험한 후부터 시작된다고 본다. 이 부분에 대한 핵심적인 내용은 평택대 김동수 교수(한국신약학회 부회장)의 “알고 싶어요 성령님” 책 리뷰에 잘 요약되어 있다.
성경에 따르면 성령체험은 여러 가지로 주어진다. 기도모임을 통해서, 말씀이 선포될 때, 찬양과 경배를 통해서, 안수기도를 통해서, 또는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강권으로도 주어진다. 기름부으심은 하나님께서 자녀를 거룩하게 구별하시고, 신적 위임을 주시고, 그 위임된 일을 온전하게 행할 수 있도록 주시는 하나님의 현시된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기름부으심은 성령체험을 통해서 시작되지만 궁극적인 기름부으심의 실체는 각자 안에 계신 성령님이시다. 따라서 기름부으심은 단지 위로부터 임하시는 성령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고 기술한 현요한 교수와 오방식 교수의 지적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다른 사람의 안수를 통해서 기름부으심이 나타날 때 우리는 흔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름부으심을 흘려보냈기 때문에 기름부으심의 전이라고 말한다. 기름부으심의 전이에 있어, 전이는 “impartation”를 번역한 말로, 그 뜻은 “나누어 줌”이라는 뜻이다. 그동안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도함으로서 그 기름부으심이 나타나는 일의 원리에 대해서는 다양한 강의와 책(예,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치유와 권능”, “알고 싶어요 성령님”)을 통해서 알려왔지만, 그 용어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기존에 나온 책들에서 나온 용어를 그대로 차용(借用)했다. 그러나 이번을 기회로 충분히 검토한 결과 “전이”라는 말은 본질을 제대로 나타내지 못하는 현상적인 표현으로 적절치 않다고 생각되며, 다른 신학자들의 용어에 대한 부정적 견해에 동의하며 더 적절한 용어를 사용했으면 한다.
요약하면 기름부으심이 넘치는 자가 어떤 사람에게 기름부으심을 나누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 세 구절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렘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요4:14)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요7:38)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하나님의 자녀는 이미 기름부으심이 있다(요일2:20, 27). 왜냐하면 하나님 전부가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기름부으심을 전이한다고 할 때 능력을 소유한 자가 자신의 능력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주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기름부으심의 근원은 성령 하나님이시고, 기름부으심을 주시고 나타내실 수 있는 분도 오직 성령 하나님 한 분 뿐이다. 성령의 흐름은 각자의 믿음의 통로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며, 그 통로의 크기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믿음의 통로가 큰 자가 더 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낼 것이다. 어떤 사람을 위해서 안수함으로 기름부으심을 전이한다는 것은, 공여자의 큰 믿음의 통로를 통하여 흘러가는 성령의 기름부으심을 수혜자가(현재 자신의 믿음의 통로의 직경은 작지만 공여자와 함께 함으로 그 능력과 역사를 보고, 자신도 그렇게 하나님의 역사에 쓰임받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그와 동일한 일들이 일어날 것임을) 믿음으로 그 성령의 흐름을 받아들이도록 한다는 것이다. 기름부으심의 나타남에는 신뢰와 존경과 믿음이 중요하다고 본다(예, 엘리야와 엘리사의 관계). 그 결과 기름부으심의 나타남은 공여자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수혜자의 심령에 계신 성령님으로부터 새롭게 확장된 자신의 믿음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과거에 이 부분을 위해 기도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펌프의 그림을 보여 주셨고 이에 대해 “알고 싶어요 성령님”책에 구체적으로 기술했다. 펌프를 설치한다는 것은 파이프를 이미 수원지에 박아 놓은 것이다(렘2:13). 그럼에도 불구하고 펌프의 손잡이를 아래위로 움직인다고 해서 물이 올라오는 것은 아니다. 물이 파이프를 통해서 흘러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한 바가지의 마중물이 필요하다(요4:14). 개인적으로 안수가 바로 이 마중물의 역할을 한다고 본다. 궁극적으로 끊임없이 쏟아오르는 물(기름부으심의 흐름)은 한 바가지의 마중물(공여자의 안수에 의한 기름부으심의 촉발)이 아니라 자신의 심령에 계신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다(요7:38).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렇게 생각할 때 “전이”라는 용어는 적절치 않은 것 같다. 의미적으로 볼 때 기름부으심의 점화 혹은 발화(ignition)일 것이다.
3) 성령의 감동으로 하는 말이 직통계시인가?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지혜로 그 말씀을 암기하고 삶에서 그 말씀을 적용하는 일뿐만 아니라 반대로 하나님께서 카이로스때에 우리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주시기도 한다.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이시고 살아계셔서 오늘도 역사하신다면, 그분은 우리가 위험에 처했을 때나 하나님께 어떤 상황을 올려 드렸을 때 우리 마음에 말할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 모두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귀신이 알려 준 것인가? 예를 들어, “그곳에 가지 마라, 이렇게 말하라, 지금 누가 어떤 일로 고통을 받고 있다, 내가 이 질병을 고치겠다 등”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감동이 성경의 말씀을 부인하거나 무시하는 것인가? 성경의 기록된 말씀이야 말로 모든 것의 기준이며,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근거이다. 그러나 그 성경의 말씀으로 우리의 실제 삶에 적용시켜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시다.
집회 때 주님께 내 마음을 드리고 그분의 내적 조명에 귀 기울인다. 다른 말로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instead, let the Spirit renew your thoughts and attitude, NLT)(엡 4:23)” 그분의 감동에 사로잡히기를 원한다. 그럴 때 내 육신의 어떤 부위를 통해서, 내적 음성을 통하여, 환상을 통하여 다양하게 감동을 주신다. 나의 생각이나 논리와는 상관없이 어떤 때는 분명하게 어떤 때는 흐릿하지만 명확하게(예를 들며, 영화를 보고 난 뒤 시간이 지나면 그 광경을 정확하게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그때 분명이 어떤 상황이었고 어떤 느낌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주어진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지식의 말씀의 은사(고전 12:8)”라고 부른다. 우리 모두가,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하나님께서 오늘날에도 말씀을 통해서(말씀으로가 아닌)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이것을 “직통계시”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감동을 제대로 받아보지 못했거나 이미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자의 잘못된 주장이라고 본다.
“지식의 말씀”에 대한 비판의 핵심은 성령님을 통한 하나님의 내적 조명의 유무가 아니라, 첫 번째는 성령의 조명으로 주어진 내용에 대한 영적 분별이고, 두 번째는 그 감동을 받는 자를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 받는 자의 영적 분별은 하나님과의 오랫동안 친밀한 교제를 통하여 더 성숙해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수가 있을 수 있다고 본다. 이것은 나타난 상황으로 판단해 보아야 할 것이다. 두 번째는 나타난 열매와 공동체적 교제를 통하여 알 수 있다. “지식의 말씀”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사역에 있어, 자신을 우상화하거나 신격화한 적이 있는가, 본인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들었다고 자랑한 적이 있는가, 그것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돈을 요구하거나 인격을 통제하고 있는가, 기존의 교회를 배격하고 독선적이고 독단적인가 등을 판단해 보아야 한다.
4) 실현된 종말론에 경도된 것 아닌가?
그동안 HTM의 치유집회와 초창기의 저서를 통해서 HTM에서 추구하는 것은 실현된 종말론적 신학, 믿음운동과 신사도운동과의 연관성, 영광 및 번영신학, 십자가 신학의 부재 등으로 평가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몇 년 전까지 저의 집회의 주안점은 주신 비전에 따라 복음의 균형성보다는 병든 자를 치유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치유 및 축귀사역에 초점을 두어 왔다는 점과 기존의 성령 및 치유사역 등에서 사용된 용어 사용 등을 고려한다면 그와 같은 평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일부분이 아니라 집회 내용의 전체적인 흐름, 각종 세미나와 스쿨에서의 가르침, 그리고 최근 저서 등을 보다 자세히 조사해 보면 HTM 사역은 결코 기존의 믿음운동이나 번영 혹은 기복신앙 그리고 신사도운동과 동일하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대한 것은 이번 오방식 교수의 발제문을 통해서도 일부나마 제대로 평가된 것을 참으로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나의 주관적 관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안에 있는 관점, 이 땅의 현실적 관점이 아니라 이미 도래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복음적(마6:10) 관점, 흑암의 권세 아래 사는 있는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아들의 사랑의 나라에 사는 관점(골1:13), 열심인 신앙생활과 간절한 기도의 관점(세상적 멘탈리티)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와 그분의 뜻이 이루어지는 관점(킹덤 멘탈리티), 간절한 기독교 신자의 관점이 아니라 하나님 자녀의 관점(갈4:7), 육적이고 혼적인 관점이 아니라 영혼육의 하나됨의 관점, 율법적인(행위보상적인) 신앙적 태도가 아니라 주의 뜻을 이루어 가는 태도,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무엇인가를 받아내는 수단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은혜로 이미 주어진 것을 이 땅에 실체로 이루고자 하는 도구로 보는 관점, 자녀는 승리하거나 온전하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점이 아니라 주의 뜻과 형상을 드러내기 위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관점,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말씀의 법적인 관점과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현실에서 실체를 나타내어야 하는 관점 등은 분명히 “실현된 종말론”과 구별되며,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희석시키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적 하나님나라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보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자면, 현재적 하나님나라에서의 믿음과 선포 이전에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실체를 시간적 측면뿐만 아니라 차원적 측면(하늘나라와 이 땅)에서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already but not yet”이라고 규정하며,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는 상태가 바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그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많은 경우 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특징을 우리는 단순한 시간적 측면에서만 고려해 왔지만 차원적 측면에서 함께 볼 때 그 놀라운 비밀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하나님나라의 도래와 이 땅에서의 실현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다른 말로 현재적 하나님나라는 이천년 전에 이미 도래하였지만, 그 도래에 따른 “now & here”의 현실적 성취는 다르다는 것이다. 대개의 경우 이 현실적 성취는 예수님의 재림 후인 미래적 하나님나라로 돌리고자 한다(그 이유는 기사와 표적의 희귀성에 기초한 경험적 판단에 따른 신학적 해석이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나님나라는 보혜사 성령님의 강림으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은 여전히 흑암의 권세 아래 있으며, 그들의 권세와 영향력은 여전하며, 거짓과 속임으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지 못하게 하고 또한 육적인 삶으로 만족하게 만들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상속자요 유업을 이어받은 자녀들은 이 현실에 묶이지 말고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하며, 그 결과로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 안에서 주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고 행동함으로써 실제적 하나님나라를 자신의 삶속에서 실현시켜가야 한다. 다른 말로 하나님나라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도래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 그 실체를 나타내기 위해서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의 약속이 “now & here”에 온전히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제한이 있는 것이다. 핵심적인 요지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약속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를 통하여 지금 여기에서 실체적으로 일어나고 있지만 완전치 않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과 교제를 통해서 더 나타내도록 해야 하는 것이지(마6:10), “already but not yet”을 단지 시간적으로만 해석하여 말씀의 실체를 나타내는데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포기한 채 미래적 하나님나라에서 이루어진다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이 바로 킹덤멘탈리티의 핵심중 하나이다. 이것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 법적 측면과 실제적 측면에 대한 비유를 들어 생각해 보자. 만약 어떤 사람이 집을 사기 위해서 대금을 치르고 쌍방 간 계약서에 서명을 했다면, 이제 실제 집은 보았거나 보지 않았거나 가보았거나 가보지 않았거나 법적으로는 이미 자신의 집이 된 것이다. 그러나 계약서를 가졌다 하더라도 실제 그 집에 들어가 사는 것은 다른 이야기이다. 그가 자신의 집에 들어가 살기 위해서는 이미 그 집에 살고 있는 자를 내보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속성은 하나님나라가 이 땅에 임하셨기 때문에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법적으로 이미 이루어 졌음),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이 땅에서 실제적으로 이루어야 한다(아직 현실적으로 이루지 못했음).
3. 현상적/실천신학적 문제에 대한 견해
1) 왕의 기도를 했는데 다 치유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요한 교수는 저의 사역에 대해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속성상 모든 사람이 다 치유될 수 없음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이 다 치유될 수 있는 것처럼 말하며, 미래적 하나님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실현된 종말론을 주장하며, 왕의 기도를 감행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이미 하나님나라가 도래했지만 그 실현은 아직 아닌 상태에서 현실적인 부분성과 잠재성을 간과하고 지나치게 주의 약속의 관점에서 선포할 때 집회에 오는 사람들은 지나친 기대를 가질 수 있고, 그 지나친 기대가 실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충분히 일리가 있다고 본다. 그러나 중요한 사실은 실현된 종말론 관점에서 왕의 기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나라에서 이루어진 약속의 말씀(법적인 측면)을 이 땅에 실체(현실의 측면)로 나타내기 위해서 믿음의 기도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오방식 교수가 지적한 바와 같이 저는 집회나 저서를 통해서 질병의 치유보다는 하나님나라의 복음과 더불어 자녀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질병의 치유, 축복, 형통을 위해서 기도하고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 주의 말씀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믿음의 기도를 하는 것이다.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차원적 관점에서 볼 때 새 언약의 약속은 하늘나라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지만 이 땅에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앞서 “실현된 종말론”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마치 어떤 사람이 돈을 지불하고 집 계약서를 가지고 있는 것과 실제로 구입한 집에서 사는 것은 다른 것과 같다. 집주인이 구입한 집에 들어가서 살기 위해서는 계약서를 들고 그 집에서 가서 “이 집이 이미 내 집입니다. 나가 주세요”라고 말해야 하는가 아니면 “이 집은 내 집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나가 주세요”라고 말해야 하는가 생각해 보라. 비록 이 땅에 살고 있지만 도래한 하나님나라에서 사는 하나님 자녀의 입장에서 볼 때 실제적으로 그 집은 아직 내 집은 아니지만 이미 법적으로는 내 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믿는대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막11:24)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히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현재적 하나님나라에서 치유사역도 마찬가지이다. 이미 영이고 생명이신 주의 약속의 말씀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령 안에서 그 말씀대로 상상하고 느끼고 선포하고 행동함으로써 그 말씀의 실체를 이 땅에 이루어가는 것이다.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믿음과 그에 따른 선포와 행동은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곳이 하나님나라이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나라에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는 존재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어떻게 믿고 말해야 하는가?
실제로 우리가 집회에서 믿음으로 기도했지만 치유나 기적을 경험하는 것보다 경험하지 못하는 일이 훨씬 더 많다. 그렇다면 주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는데 왜 주의 약속의 말씀이 이 땅에 실현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왕의 기도는 믿음으로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받아내고자 하는 믿음운동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왕의 기도는 주의 자녀로서 주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선포이다. 전자의 주체는 믿음으로 이루고자 하는 인간이지만, 후자의 주체는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주께서 그의 일을 행하시도록 내 자신을 내어드리는 거룩한 동참이다.
모든 사람들이 기도와 믿음을 가진다고 하지만, 실제로 그 기도와 믿음은 성도의 숫자만큼 다양할 수도 있다. 우선, 믿음은 마음의 작용이다. 마음은 생각, 감정, 의지로 이루어져 있고, 현재의식과 잠재의식으로 두 가지 기능을 하며, 또한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이 온전히 작동하기 위해서는 마음의 모든 요소가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을 고려한다면 왜 내가 간절히 믿고 왕의 기도를 했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에 대한 답일 수 있으며, 차원적 측면에서 “already but not yet”을 이루어가는 삶의 특징이며, 우리의 온전한 믿음과 선포는 예수님의 재림시 부활의 몸을 입을 때 완전해 진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대한 신비의 부분을 남겨 놓고 싶다. 왜냐하면 내가 받은 계시적 조명이 전적으로 다 옳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한 번 기도해서 아무것도 얻지 못할 때 실망하거나 자신의 믿음없음에 정죄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의심하는 대신, 우리가 믿음으로 주의 말씀을 실현시켜 가는 만큼 믿음의 통로가 더 열리게 되었다는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질병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차도가 없다 할지라도 믿음으로 계속 기도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런데 혹자는 왕의 기도를 하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 혹은 이루어져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고 있다. 현재적 하나님나라의 관점이 아닌 기존의 관점에서 왕의 기도를 평가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안에 계신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이루시도록 믿음의 선포를 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신유집회시 질병의 치유와 믿음을 강조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미래적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의 질병과 왕의기도 후에도 치유되지 않을 수 있음에 대한 설명, 죽음 후의 천국의 소망에 대한 관점, 풀리지 않는 고난 등에 대한 설명이 다소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부족한 부분에 대해서는 최근 발간한 최근 집필한 “킹덤빌더”에 보다 상세히 기술하여, 균형잡고자 하였다.
2) “더더더”는 성령 하나님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많은 목회자나 신학자들이 “더더더”라는 말에 반감을 가지는 것 같다. 심지어는 성령님에게 명령을 하고 부린다는 생각까지도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이것을 제대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집회 동영상을 보고 그 상황을 판단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본래적 의미는 “성령님! 더 깊이, 더 충만히 역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뜻이다. 사역 중에 시간이 없고, 더 놀라운 역사를 위해서 급한 마음으로 나오는 말이 “더더더”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성도들로 하여금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러한 말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3) 왜 쓰러뜨리는가?
쓰러짐의 현상에 초점을 두지 말고, 그 본질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 쓰러뜨리는가? 일부러 쓰러뜨리려는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쓰러뜨리고 싶다고 해서 쓰러뜨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구하고 그것을 경험하도록 간절히 기도할 뿐이다. “성령님 영광으로 임하시옵소서!” 그렇게 기도할 때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기도 받는 사람들이 자주 쓰러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이유는 하나님 영광이 우리에게 임하심으로 인하여 자신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현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도한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쓰러지는 것도 아니다. 만약 마귀의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영광이 임했다면, 본인이 스스로 통제하지 못함을 경험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또한 이러한 현상은 그것을 경험하는 사람뿐만 아니라 목도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실제적인 임재를 믿게 하고 더 큰 믿음으로 그 영광 안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혹자는 사역자가 자기과시를 통하여 자신을 신격화나 우상화하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베니 힌과 같은 사역자들이 하는 행동과 비슷하다고 말한다. 얼마든지 그렇게 말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것은 현상만으로 판단할 것이 아니라 개인의 인격과 태도와 관련하여 평가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의 HTM집회의 동영상을 보다 면밀히 검토해 보라. 개인을 우상화하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인지, 또한, 베니 힌이나 다른 성령 사역자처럼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희회화(戲畫化)시키는지? 오늘날 성령사역자가 욕을 얻어먹은 이유 중의 하나는 그 하나님 영광의 임재를 자신이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것처럼 가장하거나 장풍을 내뿜는 모양이나 총을 쏘는 것과 같은 형태를 취하며 성령의 역사를 자기 의를 나타내는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그럴 경우 그 사람에게 나타나는 것이 성령일지라도 그것은 분명히 교만한 태도이며, 하나님께서 결코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치유사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참석한 성도들의 믿음이다. 그것도 자신의 감각적이고 육적인 믿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임하신 성령에 감동되어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는 믿음(갈2:20b, 딤후3:15)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집회 때 하나님의 영광의 임재를 실제적으로 목도하고 그 안에서 말씀의 실체가 나타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는 없을 것이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성과 인성에 대한 설명 부족하다는 오방식 교수의 지적에 대해서, 저의 저작 전체를 볼 때 다른 부분에 비해 그 부분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제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그 부분에 대한 부족함은 다음 두 가지의 사실에 기인된 것으로 보인다. 첫 번째는 지금까지 예수님의 인격에 대한 강조와 닮아감에 대해서는 수없는 책들이 강조했고, 수많은 성도들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예수님의 인격을 닮기 위해서 참으로 열심히 노력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판단에는 성도들이 실제로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자신의 인격과 삶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본성과 형상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인격이셨다. 이 두 가지를 전제할 때 지금 우리는 우리가 주체가 되어 자신의 노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을 배우고 닮아가고자 하는데 너무 치중하고 있지 않는지 되물어 보아야 한다. 즉,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떻게 아버지의 성품을 드러내고 그분의 뜻을 이루어 갔는지를 배워야 한다고 본다. 그것을 가르쳐 주시는 분이 누구이신가? 바로 성령님이시다(요14:6, 요16:13-15). 즉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고 삶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단지 치유의 관점에서만 본다는 오방식 교수의 관점에는 의견을 달리하지만 전체적인 틀에서 볼 때 예수님의 인격과 그분의 삶 그리고 그분과의 인격적인 친교에 대해서 보다 세심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에는 공감한다.
5) 영적 체험과 분별의 문제
우리는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의 말이나 어떤 지식을 혼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며 우리의 심령 안에 계신다. 그리고 영이고 생명이신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부어 주신다. 그 과정은 영으로부터 혼에 부어지는 것으로 우리의 언어로 표현하기가 쉽지 않은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의 마음(혹은 혼)은 지(knowledge), 정(emotion), 의(willing)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우리의 지성과 이성이 작동하는 곳이기도 하다. 현상적으로 볼 때 우리 삶의 모든 것이 표현되는 것은 우리의 혼과 육일 것이다. 그러나, 혼은 육신의 감각을 통해서 들어오는 정보나 지식과 이미 뇌에 보관된 모든 경험을 기초로 하여 자신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하나님의 마음을 성령님을 통하여(고전 2:9-10) 자신의 혼에 부어진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는 똑같은 혼이고 육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나타내는 지식과 지혜는 세상적인 초등학문일수도 있고(골 2:6-10),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 까지 새롭게 된 것일 수도 있다(골 3:10).
오방식 교수는 “우리의 영적 체험을 살펴볼 때, 하나님은 감각적으로 느껴지고, 지성적으로 파악하여 인식할 수 있는 수준에서만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감각적인 체험만으로 포착되고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며 느낄 수 있는 분으로 다가오시지만, 우리의 감각 너머에 계시는 초월자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감각적 체험이 유익하기도 하지만, 우리의 감각적 체험들 자체와 또 그것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 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데 걸림돌로 작용할 수 있다.”라고 했다. 저는 그 점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의하며, 관점의 차이(인간의 관점과 하나님의 관점) 때문에 이견이 생겨난 것으로 본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감각적으로 느끼고 지성적으로 파악하여 인식하고자 하는” 우리의 추구로 얻어지는 혼적 체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감각 너머에 계시는 초월자께서 은혜를 베푸는 것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기관이 바로 혼과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제대로 받을 수 있는, 성령에 의해서 성화된 상상력과 감정을 가지라는 것이다. 이것은 초월명상(TM)이나 수련을 통해서 영적 세계에 들어가거나 특별한 심리적 현상을 체험하는 것과는 궤를 달리 한다. 기독교에 있어 영적 체험의 출발점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의 생명에 의해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본성이 나타나는 새로운 자기 인식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엡 4:23, 골3:10).
6) 사도적 사역과 HTM 사역자의 배타적 등급 조성
김영한 교수는 최근 출판된 “영적 분별”책에서 저의 사역에 대해서 두가지를 지적하였다. 첫 번째는 “손장로는 사도직을 인정하지 않을지라도 오늘날 자신의 사역을 사도시대의 사역과 동일시하고 있지 않는가?”, “저자도 오늘날에도 사도시대와 동일한 성령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으로 믿는다. 그러나 오늘날 어느 누구도 사도적 권능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없다. 오늘날 우리가 충만한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았다 할지라도 사도가 아닐뿐 아니라 사도적 권능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서 전적으로 동감하며, 제 자신이 사도적 권능을 받았다거나 저의 사역이 사도시대의 사역과 동일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단지 사도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유업을 이어받은 결과 나타난 현상이 사도시대에 일어난 것과 동일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을 뿐이다.
또한, 김영한 교수는 HTM에서 기도사역자로 세우는데 일정한 훈련과정을 거쳐 선발하는 것을 영적 특권의식을 가지거나 배타적 등급을 매기는 것으로 지적했다. 그러한 지적은 실제로 이러한 치유사역을 해 보지 못한 것과 사역의 부작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온 오해라고 생각된다. 일정한 훈련과정과 감독의 기간을 거치는 것은 영적 특권의식이나 배타적 등급을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는 속담이 있듯이, 제대로 치유사역에 대해서 배우지 않고 사역케 함으로써 나타나는 엄청난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함이다.
실제로 과거 많은 단체의 치유사역을 보면 사역시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질병의 근원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성경적인 기도사역을 행하지 않거나, 부적절한 신체적 접촉이 있을 경우 엄청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경우가 너무나 많았다. 또한, 내부적으로 볼때는 인격적으로 제대로 훈련받지 않을 경우 자신의 능력이나 은사로 교만해져서 다른 사역자들과 불협화음을 일으키거나 또는 단체를 떠나 독립적인 사역을 함으로써 불미스러운 일을 일으키는 경우도 많았다. HTM에서 기도사역자를 세울 때 일정한 훈련과 교제 그리고 감독의 과정을 거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점들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함이지 다른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III. 결론
온누리교회 내에서 고 하용조 목사님의 기도와 배려로 시작된 2004년도의 단독 치유사역으로부터 2008년도부터 KAICAM에 소속되어 발족된 HTM 사역까지 합치면, 이제 12년째로 접어든다. 그동안 국내외 수많은 교회에서 세미나와 치유집회를 행해 왔다. 또한 많은 목회자와 신학자들로부터 사랑에 기초한 건전한 비판과 권면뿐만 아니라 비판을 위한 비판도 받아 왔다. 그동안 잘못되고 악의적인 비판에 대해서 저의 입장을 대변하고자 하는 목회자와 신학자도 있었지만 제가 오히려 그분들에게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교회와 하나님나라의 복음전파를 위해 덕이 된다고 간곡히 만류하였다. 왜냐하면 서로 다름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신학적 성취가 마치 신앙적 성숙인 것처럼 생각하는 풍토에서 시시비비를 가리고자 하는 것은 마귀에게 좋은 일만 시키는 꼴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을 빌어 그간의 사역을 저 자신도 겸허하게 되돌아보고, 공개적으로 저의 견해를 조금이라도 밝히고 또한 부족한 점을 배울 수 있는 건전한 토론의 장을 마련해 주신 기독교학술원에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지금까지 저와 저의 사역에 대한 많은 글중에서 특별히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사랑과 애정어린 권면과 비판을 해 주신 세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첫 번째는 현요한 교수이며, 2012년 4월 6일 제 21회 기독교학술원 월례회에서 “기독교영성과 치유은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소논문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이러한 면모들을 살펴 볼 때, 필자는 전통적인 교회와 신학자들이 그를 정죄할 것이 아니라, 전문적인 신학 교육을 받지 못한 그에게 적절한 권면과 충고를 제공하여, 보다 균형 잡힌 치유사역을 하도록 돕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 필자는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초자연적인 은사로 병자를 고치심을 믿고 받아들이며, 그러한 일이 교회 안에 많이 일어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손 장로가 보다 균형 잡힌 신학과 방법으로 건전한 치유 사역을 하게 되기를 소망한다.”
두 번째는 최근 기독교학술원 원장이신 김영한 교수가 저술한 “영적 분별”책 중의 “손기철의 치유사역” 평가의 결론 부분에 “2015년부터 매년 공신력 있는 신학자들을 모시고 성령사역에 대한 신학적 심포지움도 열면서 신학적 지도도 받기를 원한다는 계획을 표명하였다. 저자는 성경에 입각한 비판과 지도를 겸허히 수용하려는 손장로의 이러한 태도가 앞으로 한결 같기를 바란다 ... 저자는 손장로의 사역이 교회친화적인 사역운동으로서 한국교회의 영적 갱신에 이바지하여 앞으로 한국 교회로부터 공인받는 하나의 제도적인 성령사역의 기관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칼빈과 그의 후예 개혁주의자들과 영국의 청교도들이 수행한 끊임없는 자기 죽이기와 자기 쇄신이라는 내면적 성화의 투쟁이 있어야 할 것이다 김영한, 『영적 분별』(2014), 461-462쪽
”라고 권면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늘 발제하신 오방식 교수님은 “오늘날 손기철장로의 치유사역에 대한 한국교회의 비판에는 신학적인 이유도 있지만 발제자가 볼 때 심리적인 요인도 상당히 작용을 한다고 본다... 앞으로 HTM의 치유사역이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한국교회와 사회에 더욱 선한 영향력을 미치기 위해서 HTM은 한국교회와 신학자들의 비평을 귀를 기울여 듣고 끊임없이 교회와 대화를 해야 할 것이다. 비록 여기서 신학적인 부분은 다루지 않았지만 발제자는 개인적으로 추후에 신학적인 다름과 그 다름에 대한 토의가 우리를 훨씬 풍성하게 하고 견고하게 할 수 있다고 본다”라고 결론을 맺었다.
세분의 권면의 내용에 전적으로 동감하며, 하나님께서 저에게 주신 세 번째 소명인 교회를 통하여 세상을 하나님나라로 변화시키는 사역에 매진하고 있다. 그것을 위해서 주기적인 심포지움이나 세미나를 통해서 많은 신학자와 목회자의 견해도 듣고 도움도 받고 싶다. 그리고 그 결과로 HTM이 한국교회로부터 공인받는 제도적인 성령사역의 기관으로 자리 잡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날 가장 큰 문제는 교단과 교파를 떠나 목회자나 성도들이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공인된 성령사역이나 치유사역 단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체험을 한 수많은 성도들이 방황하고 잘못되어 이단에 빠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기독교학술원에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참석하시는 신학자, 목회자, 성도들과의 교제, 토론, 권면을 통하여 항상 바른 신학, 바른 신앙, 바른 실천의 장안에 거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