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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탈을 쓴 이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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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의 탈을 쓴 이슬람
  • 기독교포털뉴스
  • 승인 2016.06.11 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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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석 목사 “이슬람 가는 곳, 범죄 증가·사회 분열·폭력·테러 난무”
▲ 이만석 목사

2016년 5월 25일 부산거제교회에서 이단대책세미나가 열렸다. 이 행사는 부산이단대책위원회와 연제구이단대책위원회가 주최했고, 부산성시화운동본부 이단대책위원회가 주관했다. 세미나는 하나님의 교회, JMS, 구원파, 이슬람, 신천지에 대한 주제로 진행됐다. 이중 이만석 목사(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는 이슬람 교리의 핵심을 설명하며, 한국사회가 이슬람의 진짜 모습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글은 해당 발표문을 요약한 기사이다.

한 손엔 꾸란 한 손엔 칼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 알라는 항상 의로운 자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라.(꾸란9:123).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꾸란8:39)

이만석 목사가 인용한 꾸란 내용에 따르면 이슬람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 혹은 배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처벌받지 않는다. 그리고 이슬람이 정의하는 ‘불신자’는 이슬람을 대적하는 자들뿐만 아니라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믿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다. 또한, 이 구절들은 지구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목사가 강조하는 이슬람의 교리는 ‘타끼야(Taqiyya)’다. 타끼야란 위장 즉 거짓말을 허용하는 교리다. 종교적인 의미로는 “금전적이나 생명의 손해가 예상될 경우 자신의 생각이나 종교를 숨기는 것”이다. 이슬람의 교리를 보면 ‘비 무슬림들과는 항상 전쟁상태’에 있다고 한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세상은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비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전쟁의 집(Dar al Harb)으로 나뉜다. 그러므로 전쟁의 집에 살고 있는 비 무슬림들에게는 거짓말이 용인된다는 것으로 적용된다. 특히 그들을 이슬람으로 복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이라면 이슬람을 미화시키는 모든 거짓말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될 수도 있다고 해석된다.

이 목사는 “IS가 바로 이런 꾸란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IS는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명령을 수행하라고 가르치는데, 명백하게 기록된 창조주의 말씀인 꾸란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는 종교적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목사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는 이론이 도출되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라며, “어떤 죄를 짓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핍박과 살해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중전략... 평화의 종교 & 정복하는 종교
이 목사는 “종교에 무관심한 대부분의 대중은 매스컴을 통해서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견해를 보편적 정설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답답하다”고 말했다. 이어서 그는 “이슬람의 전략은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리주의자들의 폭력과 평화주의자들의 말이 서로를 비난하는 척하며 역할분담을 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그는 그 증거로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자문 위원이었던 압둘 라흐만 알 아무디를 사례로 들었다. 아무디는 9.11 테러 후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회 때 강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는 2004년에 대표적인 테러집단으로 알려진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후원하고 있다는 것과, 자금을 불법 송금한 것이 밝혀지면서 미화 75만 불 벌금과 23년 형을 받고 수감 중이다. 또 다른 사례로 사우디아라비아를 들었다. 위키리스크에 따르면 사우디는 테러범들에게 가장 많은 송금을 하고 있는 나라로 밝혀졌다. “평화주의 무슬림들은 순진한 정치인들이나 매스컴을 이용해 이슬람을 계속 평화의 종교로 믿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슬람의 정체를 알고 그들이 숨기고 싶은 참모습을 밝히는 사람들에게는 ‘증오법’ 혹은 ‘차별금지법’ 등으로 묶어서 처벌하고 있다”는 것이 이 목사의 설명이다.

할랄 산업은 사실 이슬람 확장을 위한 것
‘할랄(Halal)’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서 허용되는 이슬람식 도축법이다. 할랄 고기는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한다. 첫째는 무슬림이 도축해야 하며, 둘째로는 도축할 때 반드시 아랍어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한다. 셋째는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이에 근거할 때 아무리 위생적인 도축장이라고 해도 비 무슬림이 도축했다면 할랄이 아니게 된다. 이 목사는 “가족들과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서 정부의 할랄 산업 지원 육성 정책을 폐기해 달라”고 촉구했다. 그리고 “할랄 장려 및 인증 비용 지원 정책은 식품산업 세계화를 통한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한 경제 활성화의 일환이라고 하지만, 사실 할랄 산업이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음식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이슬람 포교 전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에 따르면 할랄 도축은 건강이나 웰빙과 무관하며, 단지 이슬람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에 목적이 있다. 또한 비위생적이고 현행 동물 보호법에도 저촉되는 위법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비위생적인 이유는 짐승의 목을 반쯤 잘라놓고 피가 쏟아지는 채로 공중에 매달아 놓는데, 이 과정에서 짐승이 버둥거리는 동안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짐승의 경우는 죽는 순간까지 극도의 고통과 스트레스를 느끼는데, 이 때 짐승의 체내에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이 생성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 목사는 “이렇게 도축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는 할랄 음식을 ‘청결하고 안전한 먹거리’라고 홍보해 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한 그는 현재 국내의 도축장도 통폐합하고 있는 상황인데 정부가 할랄 도축장 건설을 장려하고, 할랄 인증에 드는 비용을 지원한다는 것은 종교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 어긋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건비와 할랄 인증비를 더해 한우 값이 오르고, 국민의 세금이 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한 포교자금 혹은 테러 자금으로 사용될 소지가 있다고 지적했다. 2011년에 미국 기독교방송인 CBN은 70억불 규모의 프랑스 할랄 산업의 60%를 테러 단체인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 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보도한 바 있다.

유럽의 실패를 답습하는 건 ‘No’
이 목사는 “일 년에 한 번은 이슬람에 대해서 설교하라”고 권고했다. 이슬람권에서 온 근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특별한 문화적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접근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유럽을 언급하며 유럽 사회에 이슬람으로 인해 곤혹을 치르게 된 것은 이슬람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스위스는 모스크에 첨탑 시설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국민투표로 통과시켰고, 프랑스는 여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벌금을 물리는 등 이슬람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는 있다.

하지만 그는 ‘사후 약방문’일 뿐이라며 근본적인 대책을 미리 세웠어야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서든지 범죄가 증가하고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폭력과 테러 사건이 난무하게 된다는 사실이 문제’라는 우려를 표했다. 처음에 무슬림들이 유럽에 거주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숫자가 많아지자 태도가 달라지면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집단행동을 일삼아 사회적인 불협화음이 심화되는 것이 문제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1부4처를 인정해 달라든지, 학교식당에서 할랄 음식을 급식하라든지,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등의 집단 시위를 벌이는 것이다. 이 목사는 “사회복지가 발달된 선진국에서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는 다문화 정책을 대한민국 정부가 맹목적으로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이 목사는 “성경이 말하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꾸란이 말하는 하나님은 다르다는 것을 명확히 알아서, 기독교와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의 종교가 같은 하나님, 같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함정에 빠지지 않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음은 이만석 목사의 발제문 전문이다. 

이슬람

이만석 목사 (현. 한국이란인교회 담임, 4HIM 대표)

1. IS는 가짜 이슬람인가?

최근에 이라크의 순니파 무장단체인 소위 이슬람국가(IS)의 잔혹한 만행으로 온 세상이 놀라고 있다. 한남동 이슬람 사원의 이주화 이맘은 IS 때문에 이슬람의 이미지가 나빠지자 서둘러 조선일보를 통해서 인터뷰 기사를 내면서 선긋기에 나섰다. 한마디로 IS는 “자신들의 목표를 위해 이슬람의 얼굴로 가장한 자들”이며 가짜 무슬림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견해는 매스컴을 통해서 대부분의 서방세계 정치인들의 입을 이용하여 대중에게 여과 없이 홍보되고 있다. 심지어 교황청 국무장관 안드레아 토르넬리 추기경은 이태리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최근에 발생하고 있는 중동의 기독교인들 살해 현상은 이슬람과 기독교간의 충돌이 아니라 개인적인 폭력”이라고 말했다.(Vatican Insider 2014.8.26.)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만일 그들이 가짜 무슬림들이면서 이슬람의 이름을 사칭하여 명예를 실추시켰다면 왜 세계적인 집단 시위가 일어나지 않고 잠잠할까? 미국 플로리다 주에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을 한 권 태우겠다고 했을 때 온 세계의 무슬림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며칠간 쉬지 않고 시위를 벌였었고 이로 인한 진압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었다. 아프가니스탄의 바그람 공군기지의 꾸란 소각 사건이나, 미국에서 별로 인기가 없어 관람자가 거의 없었던 “순진한 무슬림”이라는 짧은 영화가 무함마드를 조롱하는 내용인 것이 발견되었을 때도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일어나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이로 인해 분노한 시위대가 리비아의 미국 대사 및 대사관 직원들까지 살해했었다. 꾸란 한 권 태우는 일이 이슬람의 명예를 얼마나 실추시켰을까? 만일 이슬람이 참으로 평화의 종교라면 IS처럼 이슬람의 이름으로 수천 명의 생명을 무자비하게 학살하는 것이 더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한국의 한 무슬림이 신문에 인터뷰 한 번 하는 것으로 그 모순을 뒤집으려 하는 것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행동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한편 세계적인 집단시위가 일어난다는 것은 몇몇 사람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각국에서 이슬람 성직자들의 선동과 동원이 없으면 세계적인 집단시위는 도저히 일어날 수가 없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런던 시내에서 나이지리아계 영국 시민권자인 ‘아데볼라요’라는 무슬림 청년(28)이 영국 군인 릭비(25)를 차로 들이받은 후 칼로 난자하고 참수하면서 “알라후 아크바르(알라는 위대하다)”를 외치며 자랑스러운 듯 행인들에게 사진을 찍으라고 포즈를 취했다는 것은 꾸란을 한 권 태우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이슬람의 이미지를 크게 실추시킨 너무 유명한 사건이지만, 이로 인해 세계적인 무슬림들의 폭력시위가 있었다는 것은 들어본 일이 없다.

이슬람의 율법에서는 이슬람을 보호하기 위한 폭력, 혹은 배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폭력은 처벌받지 않는다. 이슬람의 명예를 위해서 혹은 무함마드를 모독하는 자를 살해하는 행위 등은 정당화 된다. 심지어는 국제사회의 눈치를 보느라 정부가 집행하지 못하고 있는 이런 행위를 감행한 담대한 무슬림들에게는 격려 차원에서 상금을 지급하기도 한다. 이것은 비단 이슬람 국가 혹은 샤리아(이슬람 율법)로 통치되는 지역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무슬림들이 소수인 지역에서도 이슬람의 성직자에 의해서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가 떨어지면 알라의 이름으로 그 명령을 집행하려는 철저히 헌신된 무슬림이 언제든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시각에 대해서 분노하는 무슬림도 있을 것이고 이런 견해를 부인하는 온건하고 순진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집트 꼽틱 기독교 사제 ‘자카리아 보트로스’라는 사람의 예는 이것이 사실임을 보여주고 있다. 그는 미국 캘리포니아에 살면서 방송을 통해 이슬람의 경전 꾸란의 허구와 모순을 정확한 이슬람 내부 자료를 근거로 밝히고 있기에 그 방송을 보는 많은 무슬림들이 타종교로 개종하거나 이슬람에 회의를 품게 되는 현상이 퍼지게 되었다. 이에 이슬람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알카에다는 그를 살해하는 사람에게 미화 6천만 불의 현상금을 지급하겠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미국 정부가 이슬람 테러단체 알카에다의 수장 빈 라덴에게 걸었던 현상금 5천만 불보다 20%나 더 큰 금액이다. 또한 ‘악마의 시’라는 글로 이슬람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는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의 목에 걸린 현상금은 150만 불로 시작해서 300만 불까지 치솟았지만 자카리아 보트로스에 비하면 비교도 되지 않는다.

그들은 언론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 미국과 유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이슬람을 모독했다는 죄목을 붙여 살해를 명하면서 상금을 주겠다는 것은 누가 봐도 테러를 사주하는 행위다. 알카에다는 국제법을 무시하는 테러집단이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치부하더라도, 살만 루시디를 살해하는 자에게 상금을 주겠다고 한 것은 호메이니의 명을 받들고 있는 이란 정부였다. 이란 뿐 아니라 이슬람권에서는 테러범들에게 자금을 지원하거나 영웅 대우를 함으로 테러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다.

온 세계를 경악시킨 9.11테러를 사주한 빈라덴은 이미 죽었지만 지금도 이슬람권의 영웅으로 존경받고 있고, 이스라엘과 평화협정을 맺었다는 이유로 이집트 사다트 대통령을 암살한 살해범 ‘칼레드 이슬람볼리’의 이름은 테헤란에 한 거리의 이름으로 명명되었으며, 그가 옥중에서 부르짖는 사진을 넣은 기념우표까지 발행되었다.

그러나 굳이 상금을 걸거나 영웅 칭호를 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이 이슬람, 꾸란, 알라, 무함마드 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한 이슬람 성직자가 그를 살해하라는 파트와(종교적 명령)를 선포하면 충성된 무슬림에 의해서 언제 어디서나 살해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세상에는 테러와는 상관이 없는 수많은 무슬림들이 평화스럽게 주변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이슬람이 평화의 종교’이므로 테러와 관련짓지 말라고 강변한다. 설사 무슬림들이 모두 테러범은 아니더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테러는 무슬림들에 의해서 발생한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미국이나 유럽처럼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권에 살면서도 이슬람의 경전 꾸란에 심취하게 되면 꾸란에 기록된 이교도들에 대한 증오 개념에 세뇌되면서 돌발적 테러범이 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외로운 늑대’형 무슬림 테러를 수사하면서 벽에 부딪히는 이유는 그들이 현존하는 어떤 테러단체와의 연관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테러를 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문제의 핵심은 정치인들이 전문가들의 조언을 통해서 테러의 원인은 바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세계 인구의 20~25%를 점하고 있는 무슬림들의 분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인들은 별 수 없이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지만 꾸란의 평화적 가르침을 오해하고 있는 일부 몰지각한 테러범들이 문제다’는 견해를 고집하게 된다. 이것을 서양에서는 ‘정치적으로 수정된 견해(Politically corrected opinion)’라고 부른다.

종교에 관심이 없는 대부분의 순진한 대중은 계속해서 매스컴을 통해 귓전을 때리는 이런 왜곡된 견해를 보편적 정설로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 답답하다. 소위 평화주의 무슬림들은 이런 순진한 정치인들이나 매스컴을 이용하여 이슬람을 계속 평화의 종교로 믿도록 강요하는 한편, 이슬람의 정체를 알고 그들이 숨기고 싶은 혐오스런 참모습을 밝히는 사람들은 소위 증오법 혹은 차별금지법 등으로 묶어서 처벌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이미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유럽에서 성공을 거두어 유럽인들은 이슬람에 대해서 부정적인 표현도 못하고 처벌이 무서워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형편이다.
이슬람의 지상목표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리주의자들의 폭력과 평화주의자들의 거짓은 무슬림들의 가장 강력하고도 효과적인 무기다. 이들은 공동의 지상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 서로를 비난하는 척하며 적당히 역할분담을 한다. 즉 IS처럼 과격한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보여준 행동모범과 꾸란의 명령을 솔직하게 표현하면서 감히 접근이나 간섭을 못하도록 가능한 한 잔인한 테러를 자행하고 대중매체를 통해서 동영상을 공개하여 대다수의 소심한 사람들을 두려움에 떨게 한다. 이는 꾸란에도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믿는 자들이여!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도록 네 이웃의 불신자들과 싸우라. 알라는 항상 의로운 자들 편이시라는 것을 알라.(꾸란9:123)

이는 전쟁터에서 무장하고 대치하고 있는 적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이웃에 살고 있는 불신자들, 즉 이슬람 이외의 종교를 믿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사주하고 있는 구절이다. IS는 바로 이런 꾸란의 명령을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강대국들이나 알라의 법을 모르는 무지한 백성들의 눈치를 본다든지 체면이나 여론 때문에 망설일 필요가 없다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명백하게 기록된 창조주의 말씀인 꾸란의 명령대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행위라는 종교적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소동이 사라지고 종교가 모두 알라의 이름으로 통일될 때까지 그들과 싸우라.(꾸란8:39)
여기서 소동이라고 번역된 아랍어 피트나(fitnah)는 최영길 교수가 한글로 꾸란을 번역하면서 “알라를 부정하는 것”이라고 각주를 달았다. 전체적으로 이 구절은 지구상에 무슬림 아닌 사람이 한 사람도 남지 않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죽여야 한다는 이론이 도출되고 이를 실천하고 있는 것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현상이다. 어떤 죄를 짓거나 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더라도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고 다른 종교를 고집한다는 것만으로도 핍박과 살해의 정당한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꾸란9:5, 꾸란5:33 등 참조)

소위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들도 이들과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이슬람 학자들이라면 부인할 수 없는 만쑤크(Mansukh)교리에 의해서 이미 취소된 평화로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믿도록 많은 홍보비용을 투자하여 미화된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 그러나 그 우두머리들은 같은 목적의 성취를 위해서 서로 역할만 분담할 뿐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고 배후에서 서로 돕고 있다. 이것도 정확하게 꾸란에 명시되어 있다. 꾸란은 무슬림들이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지 못하도록 명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보호와 유익을 위해서는 허락한다는 것이다.(꾸란3:28) 그 한 예를 들어보자.

압둘 라흐만 알 아무디는 클린턴 대통령의 자문 위원이기도 했으며 9.11 테러 후에도 워싱턴 국립 대성당에서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기도회 때 강사로 초청받을 정도로 평화를 사랑하는 무슬림으로 명성이 높았다. 그런데 그가 테러집단으로 알려진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후원한다는 것과 모금을 하여 불법 송금한 것이 발각되어 2004년 재판을 받고 미화 75만 불 벌금과 23년 형을 받고 수감되어 있다. 겉으로는 평화를 외치지만 뒤로는 서로 돕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표면상 미국과 공조하는 것처럼 보여도 테러범들에게 가장 많은 송금을 하고 있다는 것이 위키리크스를 통해서 이미 폭로되었다.

이슬람 국가 IS(Islamic State)는 이름 그대로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무함마드의 행동모범을 근거로 만들어진 샤리아를 철저하게 지키는 무장 단체로서 이슬람의 정체성을 공개적으로 선포한 가장 이슬람국가 다운 이슬람국가이며, 이것에 매력을 느낀 충성되고 헌신된 무슬림들이 세계 각국에서 모여들고 있다.
그들에 의해서 잔혹하게 고통 받으며 살해되고 있는 기독교인들과 비무슬림들을 지켜주고 보호하는 일을 위해서 물론 국제사회가 관심을 가지고 힘을 모아야 하겠지만 우선 하나님의 보호를 간절히 구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2. 할랄 산업 육성 정책을 반대하는 열 가지 이유
우리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애국 국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국민들에게 행복을 주는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대통령의 노력을 적극 지지하며 감사하게 생각한다. 정부 정책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반정부 세력과 동일시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우리 가족들과 국가 안보를 위해서 그리고 후손들의 행복을 위해서 정부의 할랄 산업 지원 육성 정책을 폐기할 것을 촉구한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래와 같은 심각한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할랄이라는 것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 의해서 “허용한다”는 뜻이다. 즉 해도 좋다는 것이지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와집”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경전인 꾸란에 의하면 고의가 아니고 모르고 먹었거나 어쩔 수 없어서 먹었을 경우는 알라께서 용서하신다(꾸란6:145)고 한다. 그러므로 할랄 인증만 받으면 17억 무슬림들의 식료품을 공급하게 되어 일확천금을 할 것처럼 홍보하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행위다.

둘째, 할랄 고기는 몇 가지 요건을 갖춰야 하는데 첫째는 무슬림이 도축해야 하며 둘째는 도축할 때 반드시 아랍어로 “비스밀라(알라의 이름으로)”라고 외쳐야 하며 셋째 짐승이 죽을 때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방향으로 머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핵심이다. 그리고 부차적으로 죽은 고기, 피, 알코올 성분, 돼지고기 등을 먹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위생과 전혀 관계가 없고 건강이나 웰빙과도 전혀 관련이 없으며 다만 이슬람의 율법을 준수하는 것만 중요하다. 오히려 할랄식 도축은 매우 비위생적이다. 왜냐하면 짐승의 목을 반쯤 잘라놓고 피가 쏟아지는 채로 공중에 매달아 놓아 고통스런 짐승이 버둥거리는 동안 피가 사방으로 튀기 때문이다. 아무리 위생적인 도축장을 건설했어도 비무슬림이 도축을 한 것은 할랄이 아니다. 이를 “청결하고 안전한 먹거리”라고 홍보해 주는 것은 국민을 속이는 것이다.

셋째, 일반 도축은 전기충격으로 기절시켜놓고 짐승을 잡기 때문에 짐승이 전혀 통증을 못 느끼면서 죽지만 할랄 도축 방식은 피를 먹지 말라는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짐승의 모든 감각이 정상인 상태에서 목뼈를 건드리지 않고 혈관과 식도와 기도를 자르고 거꾸로 매달아 놓는다. 그래야 심장의 펌프 작용으로 피가 분출되기 때문이다. 짐승은 거꾸로 매달려서 피를 분출하면서 모든 감각과 의식이 정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 까지 몇 분간 극도의 고통과 분노와 스트레스를 느끼면서 죽어간다. 이 때 짐승의 체내에서 인체에 해로운 독성이 생성될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숨기면 안 된다. 이는 동물을 잔인한 방법으로 죽이면 안 된다는 현행 동물보호법에도 저촉되는 범법행위임에 분명하다. 주로 할랄 고기를 섭취하는 이슬람권의 평균 수명이 타문화권보다 짧다는 것이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심지어는 1인당 국민소득 9만 불을 훌쩍 넘은 카타르도 평균 수명은 3만 불도 채 안 되는 우리나라보다 훨씬 짧다는 것은 결코 기후 문제로만 돌려서는 안 되며 음식 문제도 분명 관련이 있다고 본다.

넷째,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는 것은 정부가 정책적으로 지원할 문제가 아니다. 현재 할랄 고기의 대부분은 호주에서 수입한다. 그런데 호주산 쇠고기와 한우의 가격은 가격 경쟁이 안 된다. 등심을 기준으로 볼 때 2015년 초 축산협회의 조사에 의하면 호주산은 Kg 당 21,000원 이지만 한우는 34,000원이다. 한우를 도축할 때 할랄 도축사를 고용하고 할랄 관리인을 고용하면 인건비가 추가 부담되어 할랄 한우 값은 추가 상승요인이 있는 반면 호주산 쇠고기는 한국:호주 FTA에 의해서 관세를 매년 2.6%씩 인하하여 앞으로 15년 후면 관세가 완전 철폐되므로 가격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질 것이다. 할랄 도축장을 건설하면 그 비싼 한우 할랄고기를 누가 사먹을 것인가? 무슬림들 대상이라면 현재 수입하고 있는 호주산으로 충분하며 무슬림 관광객들이 대거 유입된다 하더라도 비싼 할랄 한우를 먹는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므로 이는 시장 조사와 수지 타산을 정밀 조사하여 개인과 업체가 결정할 일이지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밀어붙일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30여 곳 있는 도축장도 20여 곳으로 통폐합하는 형편인데 할랄 도축장을 다시 만든다는 것은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다섯째, 할랄 도축장에는 무슬림들만 근무해야 하기 때문에 잘 훈련된 할랄 도축사들을 수입해 와야 한다. 영국도 파키스탄 할랄 도축사들 5천명을 수입했다고 한다. 이들은 이슬람 율법에 철저한 원리주의자들일 가능성이 크므로 지역주민들과 필연코 마찰이 발생할 것이다. 이슬람 때문에 몸살을 앓고 있는 유럽의 경우를 반면교사로 삼아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여섯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한다는 것은 특정 종교의 율법을 준수하는 일을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교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정부가 이를 지원하는 것은 위헌의 소지가 있으므로 금해야 한다.

일곱째, 이슬람 율법에 “나지스(Najis)” 개념이 있는데 이는 더럽다는 뜻이다. 비무슬림들은 더럽기 때문에 상종하면 안 된다는 이슬람의 율법이며 비무슬림들이 만진 물건도 더럽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할랄 도축장에서 5Km 반경 내에 돼지 도축장이 있으면 안 되고, 비할랄 식품과 함께 운반해도 안 되고, 비할랄 식품을 조리하던 도구를 사용하여 요리해도 안 된다는 개념이다. 이는 무슬림이 아니면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이슬람의 배타적 교리 때문에 그렇다. 이는 비단 음식의 문제뿐만 아니라 사람도 무슬림들은 할랄(허용된 것)이고 비무슬림들은 하람(금지된 것)이라고 한다. 무슬림들 여성들(할랄)이 비무슬림 남성(하람)과 결혼하는 것은 금하며 그를 이슬람으로 개종시켜야 결혼이 허용(할랄)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이 음식과 식자재만 할랄로 만들어 팔면 된다는 생각은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헛된 망상에 불과한 것이다.

여덟째, 할랄 인증에 소요되는 비용을 정부가 지원하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이슬람을 확산시키기 위한 포교 자금 혹은 이슬람 테러 자금을 지원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다. 2011년 1월 5일 미국 기독교방송인 CBN은 70억불 규모의 프랑스 할랄 산업의 60%가 테러 단체로 잘 알려진 무슬림 형제단에 속한 기관들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고 방송했다.

아홉째, 이슬람의 할랄 규정은 세계적으로 통일된 것이 없다. 국가마다 그 기준이 다르고 한 국가에서도 인증기관마다 기준이 다르다. 어제 있었던 할랄 기준도 무프티(Mufti)급의 성직자가 파트와(Fatwa)를 선언하면 언제든지 없어질 수도 있고 새로 생길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가변적인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 돈을 투자하면서 동분서주하는 행위는 결코 지혜로운 일이 아니다.

열째, 일반적으로 무슬림들은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원리주의 무슬림들은 샤리아로 통치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투쟁하고 있다. 오일 달러를 이용하여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우려 하는 것이 이슬람 금융 및 쑤쿠크(이슬람 채권)라고 한다면 음식을 통해서 샤리아의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것이 할랄 확산 전략이다. 할랄 인증을 받은 회사의 경영진은 많은 돈을 투자해서 어렵게 받은 할랄 인증인데 혹이라도 직원들 중의 한 사람이 이슬람 율법을 어기는 것이 할랄 관리자들에게 발각되어 인증이 취소될 것이 두려워 직원들에게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 준수를 강요하게 된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보편적으로 즐기는 소주와 삼겹살도 회사를 해롭게 하는 준범죄행위로 취급되므로 화기애애한 직장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할랄 장려 및 인증 비용 지원 정책은 식품산업 세계화를 통한 기업의 경쟁력을 키워주기 위한 경제 활성화의 일환이라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할랄 산업이란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를 지키게 하기 위해서 음식으로 그 영향력을 키워나가는 이슬람 포교 전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는 유럽의 경우를 보건대 국가적 불협화음의 불씨가 될 것이다. 무슬림들이 급증하고 있는 유럽에서는 자경단을 조직하여 샤리아로 통치하는 지역이 프랑스에만 750곳 있으며 샤리아로 재판하는 재판소가 영국에만도 85개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스웨덴에도 무슬림들이 완전히 접수하여 샤리아로만 통치하는 지역이 55개소 있으며 이 지역에서는 무슬림 자경단이 정부경찰을 공격하고 접근을 금지시킨다고 한다. 이는 유럽의 무슬림들이 특히 악해서가 아니고 유럽인들이 무슬림들에게 복지혜택 제공을 소홀히 해서 그런 것도 아니다. 다만 이슬람의 경전의 가르침이 배타적이고 폭력적이기 때문에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러므로 할랄 전략을 통한 이슬람의 율법 샤리아의 영향력 확대는 한국의 보편적 미풍양속과 심각한 마찰을 일으키게 될 것이 확실하다. 이런 일에 정부가 국민의 세금으로 지원하는 것은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으로서 결코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킬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유민주주의를 향유하며 후손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물려줘야할 사명이 있다고 믿는다. 이를 위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할랄 산업에 지원하는 것을 당장 포기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

3. 일년에 한 번은 이슬람에 대해서 설교하라

2015년 말 현재 한국에 이주 노동자들이 60만명을 넘어섰고 노동 외의 목적으로 거주하는 외국인들까지 합하면 170만명을 넘는 외국인들이 우리 주변에 들어와 함께 살고 있는 상황이 되었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들을 우리 주변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은 큰 비용들이지 않고 선교할 수 있는 하나님께서 주신 좋은 기회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은 문화충돌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굳이 어떤 예를 들지 않더라도 세상에는 다양한 문화가 있고 각 문화권마다 특색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아주 사소한 문제가 큰 피해를 불러올 수가 있다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그 중에도 이슬람권에서 온 근로자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매우 특별한 문화적 습관이 있기 때문에 제대로 알고 접근하지 않으면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것이다.

유럽이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즉 이슬람이라는 문화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기 때문에 이제 와서 곤혹을 치르고 있으며 심지어 스위스에서는 모스크에 첨탑 시설을 금지하자는 안건을 국민들이 서명운동을 벌여 국민투표로 통과시켰고, 프랑스에서는 여인들의 몸 전체를 가리는 부르카 착용을 금하며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는 벌금을 물리는 등 이슬람을 제재하는 법을 만들고는 있지만 이는 사후 약방문일 뿐 근본적인 대책은 미리 세웠어야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유럽뿐만 아니라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은 어디서든지 범죄가 증가하고 사회 분열이 일어나고 폭력과 테러 사건이 난무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실 유럽은 기독교 문화가 오래 전부터 정착되어 있었기 때문에 자유 평등 박애 정신이 제도적으로 적용되고 있어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문화였다. 그래서 소위 “똘레랑스(관용)”정신이 사회 전반에 스며들어 있었기에 다른 문화에 대한 관용은 선진국 사람들로서의 성숙한 인격의 상징이라는 것이 사회적 통념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산업혁명과 기술과학 발달로 경제가 급성장하다보니 노동인구가 부족하게 되어 가장 가까운 북아프리카에서 값싼 노동력을 받아들이는 정책을 채택했다. 무슬림들은 본국에서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던 사람들이었기에 처음에는 유럽의 풍요를 체험하면서 그저 유럽에 거주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무슬림들의 숫자가 많아지자 태도가 달라지면서 무슬림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집단행동을 일삼아 사회적인 불협화음이 심화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1부4처를 인정해 달라든지, 학교식당에서 할랄 음식을 급식하라든지, 이슬람을 모독하는 자를 처벌하라는 법을 제정해 달라는 등 ... 이런 끈질긴 집단 시위를 통한 요구로 영국에서는 이미 각 도시에서 샤리아 법정이 85개나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이런 현상들을 연구 분석한 독일의 메르켈 총리, 영국의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싸르코지 전 대통령은 이구동성으로 이슬람 때문에 다문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그런데 사회복지가 발달된 선진국에서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는 다문화 정책을 대한민국 정부가 맹목적으로 따라가고 있다는 점이 안타깝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들의 실패를 답습하지 않기 위해서 이슬람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첫째 : 이슬람의 타끼야(Taqiyya) 교리를 알아야 한다. 타끼야란 위장 즉 거짓말을 허용하는 교리다. 이를 이란어사전에서 찾아보니 “피하다, 삼가다, 절제하다”등의 뜻이 있는데 종교적인 의미로는 “금전적이나 생명의 손해가 예상될 경우 자신의 생각이나 종교를 숨기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슬람 외에 어떤 종교가 교리적으로 거짓말을 허용하는가? 그러나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의 말(부카리 하디스)을 인용하여 세 가지 경우에 거짓말을 허용하고 있다. 즉 1. 전쟁 상황에서 승리를 위해 적을 속이는 것 2. 다투고 있는 두 그룹을 화해시키기 위한 거짓말 3.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아내를 속일 필요가 있을 때 등
그런데 이슬람의 교리를 보면 “비무슬림들과는 항상 전쟁상태”라는 것이다. 이슬람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을 둘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평화의 집(Dar al Salam)과 비무슬림들이 살고 있는 전쟁의 집(Dar al Harb)으로 나눈다. 그러므로 비무슬림들은 전쟁의 집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거짓말이 용인되며 특히 그들을 이슬람으로 복속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슬람을 미화시키는 모든 거짓말은 허용될 뿐 아니라 장려된다. 심지어는 꾸란의 번역도 미화, 왜곡 번역이 허용된다. TV 강연에서도 이슬람의 교리에 대해서 미화시킨 거짓말로 강연할 수 있다. 한 번의 거짓말로 많은 사람들에게 이슬람에 대한 호감을 갖게 할 수 있다면 알라께서 기뻐하실 것이라는 논리다.

예를 들면 “한 손에 칼을 한 손에 꾸란을”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으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거짓말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를 보면 이슬람의 신앙고백과 칼이 그려져 있다. 이것은 이슬람의 대표적 사상이지만 타끼야 교리에 의해서 평화의 종교로 둔갑시켜 대한민국 교과서에서 이런 구절들을 모두 삭제하였다. 정직하게 말하자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말은 꾸란 9장5절을 표어로 만든 것이다.

꾸란 번역도 거짓으로 미화시켜 놓았는데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3장 54절을 들 수 있겠다. 원래 3장 54절은 “그들도 알라를 속이려 했고 알라도 그들을 속이려 했는데 알라는 최고로 잘 속이는 분이시다.”라는 내용이며 영문번역은 이렇다. And they (the disbelievers) schemed, and Allah schemed (against them): and Allah is the best of schemers.(Pickthall역) 그런데 아랍어 꾸란 원문을 보면 이 문장에서 Makara라는 단어가 세 번 사용되었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보급된 아랍어 사전은 최영길, 이두선 씨가 엮은 것인데 거기서 찾아보면 Makara는 “속이다. 거짓말하다”라는 뜻 밖에 없는 단어다. 그렇다면 “알라는 가장 잘 속이는 분”이라고 번역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사전을 만든 최영길씨가 번역한 한글 꾸란은 그 단어를 ’가장 훌륭한 계획자’라고 번역해 놓았다. 경전을 번역하는 태도가 이런 정도라면 나머지 문서들이나 교리와 율법의 왜곡과 미화는 얼마나 심할까를 짐작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둘째 : 우리가 가장 많이 속고 있는 것들 중 하나는 이슬람의 신 알라가 기독교의 하나님과 같다는 생각이다. 그들은 이슬람은 알라(Allah)라는 신을 섬기고 있는데 이는 창조주 절대자 전능자 유일신을 의미하며 기독교나 유대교에서 믿는 여호와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철저히 타끼야(위장)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알라라는 신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소속되었던 꾸라이시 족속의 종족신이었으며 라트(Lat) 우짜(Uzza) 마나트(Manat)라는 세 딸을 두었던 메카의 카아바 신전에 안에 있었던 360개 우상들 중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슬람 학자들의 주장을 들어보면 꾸란에 이슬람의 신은 기독교의 신과 같은 분이라고 분명히 명시 되었다고 한다.(꾸란29:46) 꾸란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내용은 진실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근거로 진실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그 권위를 부인할 수 없는 이슬람의 경전 꾸란과 기독교의 경전 성경을 비교해보면 확인할 수 있다.

성경: 예수를 주님으로 시인하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행16:31, 마16:16)
꾸란: 예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자는 믿음에서 떠난 불신자다.(꾸란5:17, 꾸란5:72)
* 성경과 꾸란의 이 두 구절은 이를 계시한 영이 정반대의 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준다. 하나가 성령의 계시라면 하나는 악령의 계시가 분명하다.
성경: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 사함과 구원을 위해 열어 놓으신 유일한 길이다.
꾸란: 십자가는 유대인들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꾸란4:157)
* 십자가를 부인하는 것은 인류를 지옥으로 보내기 위한 사단의 최대의 전략이다.

성경: 예수께서 그리스도(구세주)라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다.(요일2:22)
꾸란: 예수는 장차 아흐마드(무함마드)가 온다는 소식을 미리 전해주러 왔다.(꾸란61:6)
* 예수 그리스도를 무함마드의 발아래 두려는 간악한 거짓말이다.

성경: 아버지와 아들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다.(요일2:22)
꾸란: 신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들 때문에 큰 저주가 임할 것이다.(꾸란19:88-91)
* 이 구절들을 비교해 보면 이슬람의 알라는 적그리스도의 영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 외에도 이슬람의 알라는 수시로 계시의 내용을 취소하고 다른 구절로 대체할 수 있는데(꾸란2:106), 하나님께서는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응하리라(마5:18)고 하셨다. 또한 하나님은 일부일처에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이혼절대불가를 말씀하셨는데 꾸란에서는 일부다처를 허용하고(꾸란4:3) 이혼은 두 번까지(꾸란2:229)라고 한다.
이 외에도 하나님은 소통이 가능한 인격적인 신이지만 알라는 인간과 직접 소통이 불가능하며(꾸란42:5) 하나님은 심판권을 인간에게 양도하지 않으셨는데(롬12:19) 알라는 인간들에게 심판을 집행하라며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 꾸란4:89, 꾸란4:91)고 하는 등 모든 면이 다른 신이지만 같은 신이라고 주장하며 속이고 있다.

셋째 : 기독교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같이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실은 이것도 거짓이다. 우리가 이슬람의 주장들을 들어보면 그럴 듯하게 들리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나 꾸란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성경의 인물들과 같다는데서 혼동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엄청난 금액의 홍보비를 투자한 덕분에 학계가 속아왔고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말에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강력하게 주장한다고 다 믿을 수는 없다. 한 번 확인해 보자.

성경 : 아브라함의 아버지 이름은 ‘데라’였다.(창11:31)
꾸란 : 아브라함의 아버지 아름은 ‘아자르’였다.(꾸란6:74)
* 아무리 이름이 똑 같다고 해도 아버지가 다르다면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성경 : 아브라함의 이름은 99세 때부터 바뀐 이름이다.(창17:5)
꾸란 : 아브라함은 어려서부터 그 이름이 바뀌지 않았다.(꾸란21:60)
* 그 때는 수백세를 살았기 때문에 99세는 젊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도 안 되는 변명을 하지만 성경은 90세의 사라가 나이 많아 늙어서 낙이 없다고 했다.(창18:11-13)

성경: 아브라함은 모리아 산(예루살렘)에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창22:2)
꾸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에서 이스마엘을 번제로 드리려 했다.(꾸란37:102-107)

성경: 아브라함은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 쪽으로 간 일이 없다.
꾸란: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이 메카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꾸란2:127)

이 외에도 이슬람의 가르침에 의하면 아브라함을 불 속에 던졌는데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고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하는가 하면(꾸란21:69) 아브라함이 책을 계시 받았다고 한다.(꾸란87:19) 이로 볼 때 꾸란의 아브라함은 성경의 아브라함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마찬가지로 꾸란의 예수도 성경의 예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꾸란의 예수는 아랍어로 이싸(Isa)라고 하는데 성경의 예수는 아랍어로 야슈아(Yashua)라고 한다. 이것을 한글로 모두 예수라고 번역하여 속이고 있는데 꾸란의 예수는 알라(Allah)만을 섬기라고 전도하며 다녔던 무슬림이었으며(꾸란5:72) 삼위일체도 거짓이며(꾸란5:73) 십자가에 죽지도 않았고(꾸란4:157) (부활도 없이) 그대로 승천했으며(꾸란4:158) 하나님의 아들도 아니며(꾸란19:88) 성자 하나님도 아니고(꾸란5:17)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오신 메시아도 아니고(꾸란5:72) 다만 무함마드가 올 것을 미리 알려 주기 위해서 왔던(꾸란61:6)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고(꾸란5:75) 한다. 꾸란에 등장하는 성경인물은 성경의 내용과는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들은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자신의 종교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성경에서 이름을 빌려다가 활용하며 계시를 빙자해 만들어낸 이야기들로서 역사적으로 입증할만한 근거 자료가 전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는 점을 알고 속지 말아야 한다.

넷째 : 대한민국의 딸들을 구해야 한다.
며칠 전에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관내 거주하는 외국인들을 관리하시는 외사과 담당자를 만났다.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관내에 거주하는 이슬람국가에서 온 사람들 중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에서 오신 분들이 30명 정도 살고 있는데 100% 한국 여성들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산다는 것이었다. 남녀평등 시대를 지나서 여성 상위시대에 살고 있는 한국 여성들이 무슬림들에게 속아서 결혼하고 무슬림이 되어서 평생을 이슬람 율법의 노예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이슬람에서 여성은 남성의 절반의 가치를 가지는 존재다. 상속도 남성의 절반을 받아야 하며(꾸란4:11) 여성의 증언은 남자의 증언의 절반의 가치가 있으며(꾸란2:282) 여성은 원할 때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라고 꾸란은 말한다.(꾸란2:223)

특히 알아야 할 점은 이슬람의 결혼 개념은 한 번 결혼하면 평생을 산다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아랍어로 결혼을 ‘니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성관계’를 의미한다. 꾸란에는 성관계와 결혼을 ‘니카’라는 한 단어로 혼용하고 있다. 그래서 결혼계약서는 성관계 계약서이며 남편이 메흐르(Mehr:혼자금으로 번역됨)라는 금액을 주고 독점 성관계 계약을 한 것이다. 아내는 평생의 반려자와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성관계의 도구로 계약을 통해서 매입한 것이며 따라서 원하면 구두로 3회만 통보를 하면 이혼할 수 있다.(꾸란2:230) 이혼이 이렇게 쉬운 이유는 이미 돈 주고 산 물건이기에 언제든지 더 좋은 물건이 보이면 하나 더 취하든지 혹은 바꾸거나 버리든지 할 수 있는 권리가 구매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대한민국에서는 결혼 당시에 메흐르(혼자금)를 정하는 법이 없기에 원할 때 부담 없이 버리고 달아나는 경우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래서 이슬람권에서 온 불법체류자들이 한국여인과 결혼하여 합법 체류자격을 얻은 후에 한국 국적을 얻으면 이혼하고 조국의 본처를 초청해 와서 같이 사는 사례도 종종 있다. 이슬람의 결혼식에서는 신과 하객들 앞에서 평생을 이 사람만을 반려자로 사랑하며 동거하겠다는 서약을 하는 순서가 없다.

그러므로 무슬림과 결혼하고자 하는 자매가 주변에 혹시 있다면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질문을 통해서 그녀를 구해줄 수가 있을 것이다.
㉠ 남편이 당신 외에 다른 여인들을 또 얻는다고 해도 결혼하고 싶은가? 꾸란에는 무슬림들은 4명의 아내까지 얻을 수 있도록 허락한다.(꾸란4:3) 내 남편은 안 그럴 것이라고 속단하지 말라. 종교적으로 허락된 사항이며 자신의 권리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변할 수 있는 가능성은 열려있다.
㉡ 언제든지 구두로 3회만 통보하면 간단하게 이혼당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최근에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로 혹은 e-mail로도 3회 통보하면 이혼이 성립된다고 한다. 이혼은 남편의 권리이며 반드시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이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원하면 언제든지 아내를 바꿀 수 있다.(꾸란4:20)
㉢ 아내가 불순종하면 구타할 수 있는 권리가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꾸란4:34)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남편이 아내를 때릴 때 제3자는 왜 때리냐고 물어서는 안 된다.”(하디스)고 말했다는 것은 이슬람의 율법이다. 최근에는 영국에서도 샤리아 법정이 생겨서 이슬람 율법으로 재판을 받기에 아내를 구타하는 무슬림들을 처벌할 수 없도록 만들어 놓았다.

㉣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그 결혼은 원천 무효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한국에서는 부부로 혼인신고해서 같이 살 수 있지만 남편이 귀국하면 아내는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한 부부자격으로 함께 살 수 없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했다고 해서 선교목적으로 결혼했어도 남편의 나라에서는 그의 개종은 합법적으로 인정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기독교인과의 결혼을 인정받지 못하기는 마찬가지다 .
㉤ 이혼한다면 자녀는 무조건 남편의 소유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이슬람의 율법의 규정이기 때문에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도 남편의 가족들이 원한다면 억울해도 아이를 빼앗기는 수밖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

㉥ 이슬람에서는 아내와 재산 공유를 해야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아내에게는 의식주를 제공하고 성관계를 갖는 것이 전부다. 모든 재산은 남편의 것이고 아내는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남편과 재산을 공동 소유한다면 분배에 많은 어려움이 생기기 때문이다.
㉦ 이슬람에는 이혼 위자료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결혼 당시에 이미 메흐르(혼자금)를 몸값으로 치렀기 때문에 의식주 제공으로 충분하며 이혼 시에는 더 이상 아무런 대가를 치를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여인의 몸을 평생 독점 사용할 수 있는데 해방시켜준다는 의미가 있다고 한다. 이혼은 아랍어로 딸락(Talaq)이라고 하는데 이는 해방시킨다는 의미이고 남성만 이혼한다(딸락을 준다)는 말을 사용할 수 있으며 여성은 이혼 당한다(딸락을 받는다)는 의미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용법이 한정된 단어다.
㉧ 여인이 이혼 당하면 숙정기를 거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숙정기란 태중의 아이가 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서 3번의 생리를 볼 때까지 남편의 집에 머물면서 기다려야 하는 기간을 말하며 그 기간 중에 남편은 원하면 이혼을 취소할 권리가 있으며(꾸란2:228) 기다리는 동안 의식주는 남편이 제공하며 임신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떠나야 하고 임신이었다면 출산과 동시에 떠나야 한다.(꾸란65:4)

이슬람의 결혼 문화를 들어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같은 문화권에서 살면서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끼리도 결혼을 한 후 함께 마음 맞춰 살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언어도 문화도 제대로 모르고 이슬람 율법도 모르면서 어떻게 함부로 몸을 허락하고 평생의 운명을 맡길 수 있는지 안타까울 뿐이다. 더구나 저들은 타끼야 교리 때문에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도 얼마든지 위장하고 속일 수 있다. 우리가 이슬람의 정체를 모르고 있기 때문에 특히 결혼을 앞둔 젊은이들에게 속히 알려 줘야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다문화 정책이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우리나라에 무슬림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 오히려 산유국 출신이라고 우대하고 있는 경향까지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의 정체를 바로 알지 않으면 유럽처럼 우리나라에도 이슬람 때문에 큰 재앙이 올 수 있다. 유럽에서 일어나는 지하철 테러나 열차테러나 학교 테러 등의 소식은 이대로 가다보면 멀리 않아 우리 가족들이 그 희생자 명단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보장은 누구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꼭 알아야 하는 것은 무슬림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슬람은 악한 영이요 악한 가르침이지만 그 영에 속고 있는 무슬림들은 우리와 같은 하나님의 피조물들이며 우리의 사랑의 대상들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 하늘에 속한 악한 영들에 대한 싸움이다.(엡6:12) 그러므로 무슬림들을 미워하며 육적인 싸움으로 몰고 가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 주변에 와 있는 무슬림들은 악한 거짓 영에 속고 있는 불쌍한 피해자들이다. 그들을 위해서 사랑으로 섬기면서 주님께 기도해서 그들의 감겼던 눈이 떠지고 참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것이 이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사명이라고 생각된다. 여러분들의 사람의 섬김과 기도를 통해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주님 앞으로 돌아와 구원에 동참하는 귀한 역사가 일어나기를 기원한다.

4. 무슬림들은 왜 타문화에 적응이 힘들까?

한국 사람들은 오랫동안 홍익인간을 숭상하는 단군의 후손으로서 단일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살아왔다. 20세기 후반부에 필자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끔 길거리에서 눈과 머리카락 색깔이 다른 외국인을 만나면 깜짝 놀라서 그 외국인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쳐다보곤 했다. 그런데 21세기 들어서면서 외국인들이 급증하더니 이제는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숫자가 150만을 넘어섰고, 한 해 동안 결혼한 부부들 중에서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이 10% 정도나 된다고 한다. 이제 대한민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을 고집할 수 없게 되었으며 어쨌든 우리 주변으로 몰려든 외국인들과 어울려 살아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그래서 정부에서는 장관급 인사 15명을 포함한 전문가들 50여명으로 구성된 국민 대통합위원회를 대통령 직속기관으로 두고 다문화정책이 우리나라에 성공적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그런데 독일의 안젤라 메르켈 총리나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프랑스의 사르코지 전 대통령 같은 유럽의 선진국 지도자들은 자기 나라의 다문화 정책이 이슬람 때문에 실패했다고 이미 공언했다. 그들도 쏟아져 들어오는 외국인들을 융화시켜 평화로운 복지국가를 유지하려고 최선을 다해 다문화 정책을 추진했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의 다문화주의자들은 유럽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도를 보완하고 풍성한 재정을 포함한 정책적 지원을 하면 우리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럴듯한 환상에 속고 있는 것 같다. 유럽의 정상들과 정치인들인들 왜 그런 생각을 안 해 봤겠는가? 재정지원 뿐 아니라 기존의 정책과 제도와 법을 바꿔가면서까지 무슬림들의 비위를 맞춰 평화롭게 공존하려고 노력해봤으나 안 되더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우리나라가 유럽에서 실패한 다문화정책을 억지로 추진한다면 우리는 그들보다 더 비참하게 실패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한민국이 그들에게 베풀어 줄 수 있는 복지혜택이나 재정이나 국민들의 의식수준이 유럽보다 결코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무슬림들은 유럽에서 그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그 문화에 동화될 수 없었을까? 그것은 특별히 문제가 많은 무슬림들만 유럽에 모여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몇 가지만 살펴보기로 한다.

첫째 : 이슬람 율법인 샤리아(Sharia)의 기본 정신 때문이다. 샤리아의 기본정신은 “알왈라 왈바라(Al Walla, Wal Bara)”이다. “알왈라(Al Walla)”는 무슬림들끼리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무조건 돕고 보호하고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는 말이다. 반면 “왈바라(Wal Bara)”는 이슬람 외의 종교를 가진 자들과는 국적, 성별, 피부색, 인종, 언어, 신분에 관계없이 절대로 존경하거나 사랑하거나 친절을 베풀거나 돕거나 친구로 사귀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철저히 미워하며 대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정신 때문에 이슬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공존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며, 특정 지역에 무슬림들끼리 모여살기를 선호하고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키는 게토를 형성해 그 영역을 넓혀 나가게 된다.

둘째 : 이슬람의 세계관 때문이다. 이슬람에서는 세계를 두 부분으로 나누는데, 한 쪽은 무슬림들만 살 수 있는 “평화의 집(다르 알 쌀람:Dar al Salam)”이며, 또 한 쪽은 기독교와 유대교를 포함한 불교 힌두교 배화교 라마교 유교... 등 이슬람 이외의 모든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사는 “전쟁의 집(다르 알 하릅: Dar al Harb)”이다. 그래서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설교나 강연들을 통해서 이슬람 이외의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항상 “지하드(알라를 위한 전쟁)”상태라는 것을 의식하며 살도록 교육 받는다. 물론 대외적으로는 이런 교육내용이 노출되지 않도록 주의하지만, 종종 그들의 교과서에 실린 이런 내용들이 서방세계의 매스컴에 폭로되어 충격을 주기도 한다. 전쟁상태라면 그들의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윤리 기준으로 평가하면 안 되고 전시행동지침이 적용된다는 의미이다. 전시에는 적을 속이는 것은 훌륭한 전략이고 적의 요인들을 암살하는 것은 칭찬받을 일이며 많은 적들을 죽인 사람은 영웅이 되고 다른 사람들이 본받아야할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하면 온 세계가 혐오하는 오사마 빈라덴 같은 끔찍한 테러범이 이슬람권에서는 영웅으로 존경받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셋째 : 무함마드의 행동지침 때문이다. 무함마드가 보여주었던 행동은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무슬림들의 모델이며 율법의 근원이 되었다. 이를 아랍어로 우스와 하사나(uswa hasana)라고 한다.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는 메카에서 힘이 없을 때는 “종교는 강제로 하지 말지니라(꾸란2:256)”라며 유화정책을 폈다. 그러다 주후 622년 메디나로 이주한 후 세력을 결집하여 힘이 생기자 주변의 족속들을 잔인하게 학살하였고, 주후 630년 고향인 메카(Mecca)까지 점령하고는 “이제부터는 두 개의 종교가 존재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특히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은 변질된 경전을 가지고 있는 타락한 무리이기 때문에 “가장 사악한 피조물”(꾸란98:6)이라며, 이슬람으로 개종하지 않는 “이교도들은 어디서 발견하든지 살해하라”(꾸란9:5)고 명령했다. 그래서 이슬람은 초기부터 전쟁과 칼로 세력을 넓혀 나갔다. 어떤 이들은 “한 손엔 꾸란을! 한 손엔 칼을!” 이라는 사상은 이슬람에 없는 것이라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는 이슬람의 여러 교리 중의 하나가 아니라 이슬람의 핵심교리이다. 이슬람의 종주국인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기 도안을 보면 녹색바탕에 이슬람의 신앙고백을 중앙에 아랍어로 적어 놓고 그 밑에 전쟁용 칼을 그려놓았다. 이는 이슬람을 받아들이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는 사람을 죽이라고 하는 이슬람의 핵심교리를 확실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넷째 : 이슬람의 나지스(NaJis) 혹은 나제스(Najes)라는 사상 때문이다. 이는 비무슬림들은 더러운 존재들이라는 관념이다. 이슬람권에 가면 비무슬림들이 쓰던 잔으로는 마시지 않는 사람들이나, 아무리 배가 고파도 비무슬림들이 주는 음식은 안 먹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몇몇 유별난 사람들이 아니라 정상적인 이슬람 율법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취하는 행동이다. 이슬람에서 가장 거룩하다고 여기는 도시 메카를 향한 고속도로 수십 Km 전방에는 “여기서부터 비무슬림들은 통과할 수 없습니다”는 대형 간판을 볼 수 있다. 또한 죄수들을 고문실로 끌고 갈 때 눈을 가리는데, 죄수가 무슬림이 아니라면 수갑 채운 손을 잡아끄는 대신 짤막한 몽둥이 끝을 잡고 따라오게 한다고 한다. 이는 비무슬림들을 불결하게 여기는 꾸란에 기록된 나지스 사상(꾸란9:28) 때문이다.

다섯째 : 이슬람에서는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삼는 것을 죄악시한다.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것은 꾸란에 기록되어 있는 명령이다.(꾸란3:28, 4:139, 4:144) 유럽에서 이슬람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는 사람들을 위해 안내하며 질문에 답변해주는 인터넷 사이트가 있다.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비무슬림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도 되는지를 문의하였다. 이슬람 성직자는 이렇게 답변했다. “그 초청에 응하는 것은 비무슬림들을 친구로 사귀지 말라는 알라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가면 안 된다.” 심지어 꾸란에는 “비무슬림들은 가장 사악한 짐승들”이라고 정의한다.(꾸란8:55) 짐승들 중에는 애완용으로 사랑받는 동물들도 있다. 그러나 사람만 보면 달려들어 공격하는 사악한 짐승은 보이는 대로 사살하는 것이 상책일 것이다. 이슬람 외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짐승이라는 꾸란의 구절 때문에 이슬람권에서는 이를 적용한 잔인한 살인사건들이 종종 발생한다. 심지어는 유럽친구들과 사귄다는 이유로 자기의 친자식들을 명예 살인하여 알라에게 충성심을 증명하려는 헌신된 무슬림들의 기사가 가끔 세상을 놀라게 하기도 한다.

여섯째 : 타크피르 문화 때문이다. 이슬람에서 카피르(Kafir)는 불신자라는 뜻이지만 배교자 혹은 이교도를 포괄적으로 칭하는 말로 “죽여도 좋은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다. “타크피르”는 카피르를 처형할 때 무슬림들이 외치는 구호 같은 것인데, 지금도 타크피르를 외치면 주변의 무슬림들이 돌과 몽둥이를 들고 달려들어 카피르에게 폭력을 행하여 죽이기까지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슬람에서는 자경단이라는 것이 있는데 배교자, 간음한 자, 살인자 등 주요 범죄를 한 자들은 법정에 끌고 가지 않고 직접 처형할 수 있다는 샤리아 율법에 근거를 둔다. 따라서 카피르에게 임의로 폭력을 가해도 처벌 받지 않는 것은 이슬람권에서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래서 무슬림들이 집단으로 몰려가서 기독교인들이 예배드리는데 불을 지르거나 결혼식장에 몰려가 테러를 저지르는 일들이 끊임없이 발생하는 것이다. 살아있는 이슬람 학자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5인방 중의 하나이며 이슬람에 관한 책을 120권이나 쓴 유수프 가라다위는 “만일 배교자를 살해하라는 율법이 없었다면 이슬람은 오래 전에 없어졌을 것이다”고 말했다.

일곱째 : 딤미(Dhimmi) 사상 때문이다.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기독교인이나 유대교인들로부터 목을 자르지 않는 대가로 받는 인두세(지즈야-Jizya)라는 세금제도가 있었는데, 이런 세금을 내고 목숨을 부지하는 하층민들을 딤미(Dhimmi)라고 불렀다. 이 딤미 제도는 철저한 인권 유린, 폭력과 무거운 세금으로 타종교인들을 괴롭히던 제도였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중동을 통치할 때 없애버렸다. 그러나 그 정신은 아직도 무슬림들의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고, 열성적인 무슬림들은 꾸란을 읽다가(꾸란9:29) 이 제도가 사라졌다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속히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어 21세기에도 이 제도를 실행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매주는 아닐지라도 모스크에서 설교를 통해 이런 가르침을 받고 있는 무슬림들은 타문화에 적응이 거의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다. 이 글을 읽는 독자 중에는 이미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는 무슬림들도 많은데 왜 하필 극단주의자들의 견해를 들먹이며 혐오감을 조성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극단주의 무슬림들이 깜짝 놀랄만한 테러를 저질렀을 때 그 많은 평화주의자 무슬림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 현상을 무엇으로 설명할 것인가? 그들도 이슬람의 율법인 샤리아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이슬람의 궁극적인 목표에는 동의하지만 성취 방법에서만 약간의 차이를 보일 뿐인 것이다.

5.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인가?

우리는 이슬람을 잘 안다고 하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아브라함의 종교 이야기를 종종 들을 수 있다. 즉 아브라함의 종교를 이삭을 통해서 전수받은 사람들이 기독교와 유대교인들이라고 한다면 이스마엘을 통해서 전달 받은 사람들이 바로 무슬림들이라고 하는 설명이다. 그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슬람의 신 알라(Allah)와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섬기던 바로 그 신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기독교와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종교를 타락시키고 경전으로 내려 준 성경을 변질시켰기 때문에 무함마드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경전의 원본을 내려보내어 아브라함의 종교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이 이슬람이라는 주장을 많이 들어왔을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각없이 반복되는 이런 거짓말에 속아서 오늘날의 중동사태를 배다른 형제들의 싸움이니 이삭과 이스마엘의 싸움이니 하면서 무슬림들의 근거 없는 주장을 대신 홍보해 주고 있는지 모른다.

무함마드는 과연 이스마엘의 후손인가? 이 문제를 생각하자면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부터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성경의 아브라함(Abraham)과 꾸란의 이브라힘(Ibrahim)이 과연 같은 인물인가? 우선 성경의 아브라함은 아버지 이름이 데라(창11:31~32)라고 되어 있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의 아버지 이름은 아자르(Azar)라고 한다.(꾸란6:74) 우선 아버지가 다르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의 아브라함의 원래 이름은 아브람이었는데 99세 때부터 하나님께서 바꿔주신 이름이다.(창17:5) 그런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젊었을 때부터 이브라힘이라고 불리던 사람이었다.(꾸란 21:60) 또한 성경의 아브라함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불속에 던져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이방인들이 그를 불속에 던진 것을 알라께서 구해 주셨다고 한다.(꾸란21:68~69) 꾸란의 여러 주석에 보면 그를 태워 죽이려던 이방인들은 앗수르왕 니므롯의 백성들이라고 한다.(김용선 주석, 최영길 주석) 특별히 성경에 아브라함은 사우디 아라비아의 메카에 간 일이 없는데 꾸란의 이브라힘은 메카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카바(Kaaba)신전을 건축한 사람이라고 한다.(꾸란2:125~127) 그리고 이슬람의 제 2경전이라고 불리는 부카리의 하디스(Sahih al Bukhari)에 보면 이브라힘은 이스마엘에게 이혼을 명령했다는 것이다.(Bukhari hadith volume4 book55 number584)
성경과 꾸란의 이러한 극심한 내용상의 차이는 성경의 아브라함과 꾸란의 이브라힘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스마엘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스마엘이 메카로 간 것이 아니라 바란 광야에서 살았다고 기록하고 있다.(창21:21) 우리 성경은 ‘그가 바란 광야에 살 때에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애굽 여인을 아내로 얻어 주었다’고 되어 있어서 애굽 여인과 결혼할 때는 그가 바란 광야에 살았지만 평생을 거기서 살았다는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지만 히브리 원문에는 ‘때에’라는 말이 없다. ‘그는 바란 광야에 살았다. 그리고 그의 모친이 애굽 여인을 그에게 아내로 주었다’는 것이 올바른 번역이며 킹제임스 번역이나 굳뉴스 바이블도 그렇게 번역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의 거처는 바란 광야 즉 이스라엘 남쪽이며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보냈던 가데스바네아 북부의 바란 광야였다고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마엘이 메카에 가서 살았다는 이슬람의 주장이 성경적으로 보면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렇다면 이스마엘의 후손들 중 어떤 사람이라도 메카에 가서 살았고 그들의 후손 중에 무함마드가 태어나서 이슬람이라는 종교를 시작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친절하게도 이스마엘의 후손들의 거처까지 알려주고 있다. '이스마엘의 자손들은 하윌라에서 앗수르로 통하는 애굽 앞 술까지 이르러 그 모든 형제의 맞은 편에 거주하였더라’(창25:18) 그런데 하윌라에서 술까지 통하는 지역이 어디인지 우리가 잘 모른다. 그러나 친절하게도 영어 성경에 보면 거기가 어딘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Near the border of Egypt(이집트 국경 부근)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쉽게 생각해봐도 이해가 되는 부분이다. 왜냐하면 이스마엘의 모친인 하갈은 애굽 여인이었다. 그리고 이스마엘의 아내도 애굽 여인이었다.(창21:21) 그렇다면 이스마엘과 그의 후손들이 애굽 근처에서 살았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왜냐하면 어머니의 언어이자 할머니의 언어를 그 자식들과 손자들이 자연스럽게 배웠을 것이기 때문에 말이 통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살았을 것이라는 것이 자연스런 추측이며 성경도 애굽 국경 부근에서 살았다고 증거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 측의 주장을 합리화 하려면 이스마엘의 몇 대 후대의 자손들이 언젠가 메카로 이주해 와서 그 조상 이스마엘이 아브라함과 함께 섬기던 그 창조주 하나님을 섬겼었는데 그 후손 중에서 무함마드가 태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주장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주장인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훌륭한 학자가 주장한다고 할지라도 성경의 근거가 뒷받침 되지 않으면 우리가 받아들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섬기지 않았으며 오히려 하나님과 원수된 사람들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시편 83편을 읽어 보면 3절에 ‘주님의 원수들이 떠들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었나이다’라고 호소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원수들이 누구란 말인가? 6절에 ‘에돔의 장막과 이스마엘인과 모압과 하갈인’... 이들이 주님의 원수들이라고 성경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마지막 18절에 보면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를 마치고 있다. 즉 이스마엘 후손들과 하갈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원수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괴롭히며 살았던 것이지 그 후손들이 아브라함의 신앙을 그대로 대대손손이 물려 주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스마엘이 하갈의 복중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자가 그의 장래를 예언해 준 것에도 잘 나타나 있다.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He will lie in hostility toward all his brothers.’(창16:12) 이스마엘은 태어나기 전부터 그의 형제들과 대적하며 살 것이라고 예언되어 있으며 이스마엘의 후손들도 ‘모든 형제의 맞은편에 거하였더라.’(창25:18)라고 번역되었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 ‘they lived in hostility toward all their brothers.’라고 되어 있다. 이스마엘은 그의 형제들과 적대적 관계로 살 것이고 그의 후손들 역시 그 형제들 즉 이삭의 후손들과 적대관계를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고 또 그 예언대로 적대적 관계를 가지고 살았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시편83편) 그러므로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전수받은 그 믿음을 충성스럽게 지키다가 무함마드 때에 그 믿음을 크게 확산시켰다는 주장은 이스마엘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원수로 살았다는 성경 말씀과는 정반대의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이브라힘이 이스마엘과 하갈을 데리고 메카에 와서 거기 버려두고 갔다고 한다. 그 때 메카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는데 천사가 파준 우물 잠잠(ZamZam)에서 물이 흘러나오자 주르훔(Jurhum) 족속의 사람들이 와서 함께 살기를 청하였고 그 때 이스마엘은 젖먹이 였으며 그들이 이스마엘에게 아랍어를 가르쳐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하갈은 주르훔 족속의 아랍 여인과 이스마엘을 결혼 시켰다는 것이다. (Sahih Bukhari volume4 book55 number584) 그래서 이스마엘은 아랍인들의 조상이 되었다고 하는데 성경에 의하면 이스마엘은 메카에 가지도 않았으며 이집트 여인과 결혼을 했다. 그러나 이 하디스를 기초로 하여 후대 사람들이 무함마드의 족보를 만들어 내었다. 이슬람의 제2의 경전인 부카리의 하디스에 이스마엘은 주르훔 족속에게서 아랍어를 배웠다는 것을 보면 아랍인들은 이스마엘 이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것이며 따라서 이스마엘이 모든 아랍인들의 조상이라는 말은 거짓이라는 것이 이슬람 내부 자료를 통해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후대에 만들어진 무함마드의 족보는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씨엗 유쑤프(Syed Yusuf) 등의 대부분의 이슬람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 까이달(Qaidar-게달)의 후손이라는 주장이다. 또 하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만들어지기 거의 100년 전에 무함마드의 전기 ‘씨라툴 라쑬알라’를 최초로 펴낸 이븐 이스학(Ibn Ishaq)같은 비중있는 학자들의 자료에 의하면 무함마드는 이스마엘의 첫째 아들인 나빗(Nabit-느바욧)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자료는 모두 무함마드부터 이스마엘 까지를 25 세대로 그 족보를 소개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웹싸이트에는 30세대로 소개하는 곳도 있다) 무함마드는 주후 570년에 태어났으며 아브라함은 주전 2000년 전 사람이다. 그 두 사람 간을 연결하는 인물들이 본인들을 제외하면 23명이라는 족보는 누가 봐도 약 2570년간을 채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또 한 가지 놀라운 것은 하디스에 무함마드가 자신의 근본에 대해서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자기(무함마드)는 무다르(Mudar)의 후손이며 그것은 지브리일(Gibriil) 천사가 자기에게 가르쳐 주었다’고 했다는 점이다. (Ibn Sa'd, Kitab al-Tabaqat al-Kabir, Volume I, p. 4) 무함마드 자신도 몰랐고 그 조상들에게 전해들은 것도 아니고 자신의 가문이 간직하고 있었던 족보에 근거한 것도 아니며 다만 천사가 말해주었다는 아무도 입증할 수 없고 증거도 찾을 수 없는, 계시를 빙자한 무함마드 개인의 일방적인 주장일 뿐이다. 그것을 근거로 부카리의 하디스에 보면 무함마드가 키나나(Kinana)의 아들 나드르(Nadr)의 자손 무다르(Mudar)의 종족에 속하였다고 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6, Number698) 물론 후대 사람들은 이들의 이름을 무함마드의 족보에 포함시켜서 명단을 만들어 낸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슬람 이전의 문헌에는 이스마엘과 무함마드가 혈통상으로 관계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자료가 없다. 이는 모두 이슬람 이후에 무함마드가 했다는 말을 수집하여 엮은 하디스에 근거를 두고 만들어진 것인데 그 하디스라는 것들이 무함마드가 죽은 지 약 200년 후부터 모으기 시작한 것이다. 죽은 지가 200년이 넘은 사람이 살았을 때 했다는 말을 수집했다는 것의 신뢰도가 어느 정도나 될까를 상상해 보기 바란다. 그래도 무슬림들이 경전처럼 여기는 부카리의 하디스에서는 종종 황당한 기사들이 발견되는데 예를 들면 ‘지구 상의 최초의 성전은 메카의 카아바 신전(Masjid ul Haram)이고 두 번째 성전은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인데 그 두 건축물 사이의 역사적인 간격은 40년 이라는 것이다.(Sahih al Bukhari Volume 4 Book 55 number 585) 카아바 신전이 자기들 말로는 이브라힘과 이스마엘이 건축했다면 주전 1950년 경에 건축했다는 말인데, 무함마드가 주후621년 어느 날 밤중에 천마(天馬)를 타고 방문했다는 예루살렘 성전(Masjid al Aqsa)과 역사적 차이가 40년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때 예루살렘 성전은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장군에 의해서 파괴되어 존재하지도 않았지만 무함마드는 거기 가서 선지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고 주장하기에 예루살렘 성전은 오늘날 이슬람의 성지가 되어 있는 것이다.(꾸란17:1 참조)

이슬람의 제2경전이라고 하는 부카리의 하디스가 이 정도 수준이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종교가 아니라 무함마드가 속했던 꾸라이시(Quraish) 종족의 신 알라(Allah)를 여호와 하나님과 동일한 신으로 교묘하게 둔갑시키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이름을 메카로 끌어들여 그가 자신의 서자인 이스마엘과 함께 카아바 신전을 건축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 낸 무함마드가 창시한 종교인 것이다. 그러기에 전에는 이슬람을 마호메트교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슬람이 아브라함의 종교라는 근거 없는 비성경적 말을 함으로 본의 아니게 그들의 거짓말을 홍보해주는 어리석은 행위는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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