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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예언자(선지자)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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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예언과 예언자(선지자)란
  • 정정조 목사
  • 승인 2018.01.25 22:4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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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역 [겔 13:1~7]
1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2 인자야 너는 이스라엘의 예언하는 선지자를 쳐서 예언하되 자기 마음에서 나는대로 예언하는 자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3 주 여호와의 말씀에 본 것이 없이 자기 심령을 따라 예언하는 우매한 선지자에게 화가 있을진저

(4 이스라엘아 너의 선지자들은 황무지에 있는 여우같으니라. 5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도 아니하였느니라. 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이 허탄한 것과 거짓된 점괘를 보며 사람으로 그 말이 굳게 이루기를 바라게 하거니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라.)

7 너희가 말하기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하여도 내가 말한 것이 아닌즉 어찌 허탄한 묵시를 보며 거짓된 점괘를 말한 것이 아니냐

기독교에서의 예언자는 국어사전에서 나오는 대로 단순히 앞일을 미리 말하는 자가 아니다. 구약시대의 예언자는 세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첫째로 하나님이 보내신 자이어야 하고 다음으로는 개인에 대한 사항이 아니라 선민 전체를 위한내용이어야 하고 마지막으로는 예언자가 진정으로 민족을 위하는 삶을 사는 이어야 한다.

옛날 유대 땅에서도 나라 걱정은 전혀 하지 않으면서도 입만 가지고 예언자노릇 하는 이들이 많이 있었다. 전쟁을 대비하기 위하여 조금도 노력하지 않으면서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는 거짓 예언자(선지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언자는 자기의 마음에서 나는 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거나 그 내용이 개인의 화복에 관한 것이면 그는 거짓 선지자이다. 위의 3절에서 “본 것 없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 없이”라는 의미이다.

이스라엘민족에 대한 하나님과 예언자들의 관심은 그 민족만의 일이 아니라 온 세상을 위하여 보내주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준비하는 과정의 일이다. 그리고 그 큰일은 이미 다 이루었고 더 이상은 성경의 예언이나 예언자는 없는 것이다.

근거 없이 자기 마음에서 정보를 생산하는 일종의 능력 - 종교적 본능 - 이 거짓된 예언을 충동질하는 것이다. 성경을 빙자하여 개인의 경험을 합리화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 기독교신앙은 증거가 있고 만민의 죽음과 삶의 갈림길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방종교의 신앙은 개인이 본능적으로 믿고 싶어 하는 것을 믿는 그런 신앙이므로 허탄한 것이다. 사울 말년에 다급하니 자기가 쫓아냈던 접신녀를 찾아간다. 죽은 사울을 불러 달라고 하니 그녀는 처음에는 엘로힘이 땅에서 올라온다고 거짓말을 하였다.

누군가가 올라온다고 하니 사울은 그가 사무엘이기를 바랬다. 행색을 물으니 접신녀가 거짓말을 이어간다. 노인이 올라오는데 겉옷을 입었다하자 사울은 당장 그가 사무엘이라고 믿었다. 성경은 산자의 일을 위하여 죽은 자에게 물어서야 되겠느냐고 했다.

[사8:19]
19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하지만 사울은 워낙 군급하여 약간의 근거만 있어도 믿고 싶어 했던 것이다. 믿고 싶어서 믿는 것. 이것이 비기독교적 믿음인 것이다. 진정한 기독교적 믿음은 성령의 역사와 함께 전해져오는 복음을 듣고 그 은혜에 감복하여 믿는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믿음은 자신에게서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물은 신자 각개인의 일상생활의 소원이나 들어주는 사소한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믿음 안에서 건전하게 성장하는 것이다.

고린도 전서 14장에서의 예언은 그 의미가 국어사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성장과정에서 필요한 말씀을 들을 기회인 것이다. 예언이 은사의 중요한 부분임이 확실하다면 그 예언은 당연히 교회에 찾아오는 이들의 신앙의 증진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구약시대의 예언은 장차 올 구세주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신약시대에는 같은 단어이지만 이미 현실화된 구세주와 신자간의 모든 현실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예언 은사는 매일 매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거룩한 말씀을 전하고 듣는 일이다. 목회적 입장에서 그것은 대부분 설교에 귀속된다.

바울은 예언은사에 대하여 말하는 가운데 이런 규정을 주었다.

[고전14:24, 25]
24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무식한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25 그 마음의 숨은 일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시다 전파하리라

[고전14:29~33]
29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30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31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32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33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위에서 보면 예언이 미리 말하는 것이라는 국어사전적 의미는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신앙생활에서의 책망, 판단, 숨은 일 드러냄, 배움, 권면 등등이다. 이런 것들은 신자가 교회에 모였을 때 얻는 신앙적 유익인 것이다. 은사는 유익을 위해 주신 것이다.

[고전12:7]
7 각 사람에게 성령의 나타남을 주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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