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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친엄마에게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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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이 친엄마에게도 사죄하고 용서를 구합니다···
  • 정윤석 기자
  • 승인 2021.01.07 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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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개독으로 불리는 목사의 고백

이번만큼 제 스스로 개독교인으로 불리는 게 어쩌면 맞겠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거 같습니다. 네 그렇습니다. 저는 인터넷 세상에서 개독교로 불리는 교인이고, 언론사를 운영하는 정윤석이라고 합니다. 참담하고 비통한 심정으로 오늘 2021년 첫 방송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직접 [그것이 알고 싶다] 2021년 1월 2일 방송을 보신 분도 계시고 못 보신 분도 있겠지만 아마 소식은 어떻게든 들으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정인이의 사망사건입니다. 그 사건이 비통하고 참담한 이유는, 한 어린이가 처참하게 학대를 당하다가 하늘나라로 갔다는 것만도 견디기 힘든데, 연약하고 무력한 어린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할 그 어린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가장 큰 책임자인 양부모가 소위 말하는 크리스천에, 양가 부모는 목회자에, 그들이 나온 곳은 국내 가장 유명한 ‘하나님의 대학’으로 알려진 학교 출신자라는 점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본방을 보지 못했었습니다. 그러나 본방은 아니더라도 하도 이슈가 돼서 보기조차 심적으로 어려웠지만 꾹 참고 다시보기로 돌려 봤습니다. 그 자세한 내용은 여기에 거론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사실 입에 담기도 너무도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얘기들이기 때문입니다. 그 주요한 사건들은 인터넷 검색을 하면 누구든 보실 수 있고 아실 것이라 사려됩니다.

16개월 만에 숨을 거둔 정인이를 두고 '정인아 미안해'라는 목소리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미안함은 한 어린이에 대한 사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이 미안함은 세상을 바꾸는 에너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찾아야 합니다. 이런 끔찍한 사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성찰해야 합니다. 왜 교회는 물론 소위 기독교학교에 기독교인이었을, 그리고 주일에 교회에 다녔을, 그래서 분명히 교회를 갔으면 유명 기독교 학교 출신이라는 사실 자체로 교인들의 인정을 받았을, 그리고 ‘나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입니다’ 등 우리가 불렀을 똑같은 찬양을 부르고 예배하고 기도했을, 그래서 우리 옆자리의 그 기독교인이었을 그 사람이 왜 현실 악마였느냐라는 점입니다.

크리스천들의 이런 이중적인, 사회속에서 ‘개독교’라고 부르고 비난하게 만드는 일이 왜 끊이지 않는가, 근본적 해결책이라는 게 과연 있는가, 이런 시대 속에서 교회는 그래도 과연 필요한 건가, 이런 사태 속에서 신앙이 과연 의미가 있는 건가라는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근본적 고민과 자성 없이, 변화와 갱신 없이 이단사이비보다 더 악한 행각들이 계속 교인들과 교회의 이름으로 벌어진다면 이 세상에는 사이비들이 득세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 아니겠습니까. 

사건 개요입니다. 정인이는 참 예쁜 아이였습니다. 친모의 말할 수 없는 사정으로 입양기관에 맡겨졌고 피의자 부부가 입양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후 16개월에 심정지 상태로 발견됐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부검을 담당한 의사들 중에는 “우리 딸 죽으면 어떡해요”라고 울고 매달리는 양모를 보면서 ‘진심 악마가 있다면 저런 모습일 것’이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생후 16개월의 아이를 너무도 처참하게 짓밟았기 때문입니다. 정인이는 사망당시 1. 후두골 골절 2. 좌측쇄골 골절 3. 좌측늑골 골절 4. 우측늑골 골절 5. 우측척골 골절 6. 좌측 견갑골 골절 7. 우측 대퇴골 골절 8. 소장·대장·장간막 파열·췌장 절단으로 복부 과다 출혈 9. 등에 피하출혈 10. 옆구리에 피하출혈 11. 배에 피하출혈 12. 다리에 피하출혈된 상태였습니다.

그 어린아이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살 수 없냐고 하소연했다는 그 악마는 사실 우리 옆의 교인, 우리와 같은 신도, 기독교 계통 학교 출신자였습니다. 진행자는 ‘정인아 미안하다. 몰라서, 이제 알아서, 어른으로서 사과하고 용서를 빈다’고 했습니다. 저 또한 ‘아멘’이라는 말을 하지 않으면 밥을 먹지 못하는 학대에 노출이 됐을 정인이를 생각하면서, 파플로프의 실험 개처럼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던, 그리고 ‘아멘’이 폭력이 됐을 그 순간을 생각하며 한 사람의 어른으로서, 그리고 크리스천으로서 정인이에게 사과를 하며 시작합니다. 정인아 미안하다. 참된 종교적 진심을 담아야 할 ‘아멘’이란 용어가 네게는 먹고 살려면 할 수밖에 없는 처참한 폭력이고 폭행이고 상해였구나. 정말 미안하다. 용서해다오.

먼저 우리는 참된 생명을 가진 성도라는 얘기 이전에 상식을 갖춘 참된 종교인의 가치를 중요시하지 않고 있는지 되돌아 봤으면 좋겠습니다. 종종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다가 형식만 갖춘, 교회만 다니는 사람들을 향해 ‘껍데기만, 형식만 갖춘 종교인들’이라는 말을 듣습니다. 제가 종종 강조하지만 종교란 마루 종자에 가르칠 교 자입니다. 가장 최상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그 최상의 가르침을 베풀고 나누고 받아들이는 참된 종교인으로서 우리가 기본만 한다면 미디어에서 기독교가 욕먹는 일은 사라질 겁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진짜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으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진 종교인으로서, 대한민국의 시민으로서 상식과 기본만이라도 제대로 갖출 것을 요구할 뿐입니다.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슈바이처처럼 먼 나라로 가서 그 나라 국민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게 아닙니다. 제발 이 나라 이 땅에서 기본과 상식을 갖춘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했으면 좋겠습니다. 왜 우리가 개독교로 불리고 있습니까? 생명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니어서입니까? 저는 아니라고 단언합니다. 생명이 아니라 종교인다운 종교인이길, 기본만이라도 갖출 것을 원한다고 봅니다. 뭔가 차별화된 것을 찾다가 비상한 것에만 관심을 갖다가, 그래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다가 이상한 거란 이상한 거, 비상식적 행각과 사고와 모든 것을 생명과 성령과 영성이란 이름으로 끌어 당겨쓰는, 그래서 전혀 기독교적이지 않은 면모를 보여왔던 게 기독교 아니었습니까? 그런 모습을 취재 현장에서 많이 봐왔던 저는 이 사건을 통해 오히려 기본만이라도 제대로 해주길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그게 전부는 아니지만 그게 첫 시작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둘째, 우리는 일상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한 인간임을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유튜브 채널 등 많은 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육신은 속된 것, 죄악된 것이라고 경시하도록 가르칩니다. 그리고 영은 선한 것, 아름다운 것이라고 미화하면서 세속 문화와는 단절하고 벽을 쌓고 정보를 통제하고 자신의 채널을 통해 공급되는 것이 참된 영적이고 신령한 것이라고 세뇌하는 채널들이 있습니다. 그거 버리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4).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게 기독교적 가치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일반 ‘은총’의 영역에 속합니다. 그곳은 버리고 멀리할 곳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 함께 살며 고치고, 바꾸고, 변화시키고, 때로 유지해야 할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또다른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우리에겐 본향이 있지만, 장차 가야 할 소중한 본향이 있지만 그곳에 가기 전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통치의 한 영역인 이 땅에서 일상의 삶을 소중하고 아름답게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일상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우리의 노력들은 영적인 노력만큼이나 가치 있습니다. 기도를 하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내야 합니다. 그 시간을 내야 하는 것 때문에 방 청소가 돼 있지 않다면! 성경을 보기 위해 우리는 시간을 들여야 합니다. 그 시간을 내야 하는 것 때문에 설거지가 돼 있지 않다면, 빨래가 돼 있지 않다면! 기도만큼이나, 성경보는 것 만큼이나 공을 들이지 않으면 우리의 건강한 영적 생활을 유지하게 하는 일상 생활은 어쩌면 영적인 생활만큼이나 빨리 무너질 수밖에 없는 영역입니다. 나아가 비난까지 받게 돼 있습니다. 우리는 일상의 삶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노력해야 합니다. 기도·말씀의 가치 만큼이나 일과 노동의 가치를 소중히 여기지 않으면 잘못하면 이원론적 딴 세상에 사는 그리스도인으로 변질될 수 있습니다.

셋째, 구약에 나타난 체벌 방식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해야 할 절대적 양육 방식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자녀 양육과 관련, 징계를 언급하며 무서운 설교를 하는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로 잠언에 그런 말씀들이 많이 나옵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치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죽지 아니하리라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 영혼을 음부에서 구원하리라”(잠 23:13~14). 이 말씀을 근거로 가혹하게 자녀들을 징계하는 부모들, 이 성경 구절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경우가 적지 않을 겁니다. 결과적으로 이 구절에 나오는 것을 실천하다가 실제로 죽음에 이르는 어린이들에 대한 뉴스가 교회와 관련해서 나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방식이라고 매질, 채찍을 들고 과하게 체벌하면 그것 자체로 아동학대입니다.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알려진 미국에서 체벌이나 매질 자체를 아동학대로 규정하고 엄벌에 처하고 있음을 우리는 매우 관심있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보이지 않는 사적인 공간에서 사랑과 훈계를 빙자해 죽지 않을 만큼 채찍같은 것으로 매질을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한 폭력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걸 간파한 청교도가 세운 국가의 처리방식입니다.

징계에 대한 말씀과 달리 “오래 참으면 관원이 그 말을 용납하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는 말씀도 있습니다. 우리의 부드러움이 뼈처럼 강하고 딱딱한 상대를 녹일 수 있습니다. 그건 자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잠언 말씀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절대진리인 성경에서는 그 시대의 문화·사회적 배경에 따라 오늘날 말씀의 정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지, 문자 그대로 실행을 해선 안되는 구절들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형제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너희는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고전 16:20)는 말씀이 대표적입니다. 서양 문화 속에서 이 내용은 안부를 묻는 문안이 핵심이어야 하지 문화적 옷을 입은 ‘입맞춤’을 절대 진리라면서 그대로 했다간 우리는 교회에서 쫓겨납니다. 체벌에 있어서도 우리는 그 말씀에서 추구하는 정신을 받아들여야 하지 실정법에서 어긋나는 행위까지 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그건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는 자세가 아니라 문자적 원리주의자로 가는 길이 됩니다.

넷째, 강압적 교육을 통한 종교교육이 결코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정인이의 양모는 아멘을 하지 않으면 밥을 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종교적 규율에 심하게 얽매인 모습입니다. 파블로프의 개처럼 조건 반사로서의 신앙교육입니다. 내 진실한 내면세계와 그것의 변화가 참된 신앙임을 알았다면, 그리고 그 모든 것 전에 한 인간에 대한 진정하고 진실한 사랑이 있었다면 결코 나오지 않을 행위였습니다. 종교적 규율을 말하기 전에 우리에겐 종교를 떠나 사람에 대한, 다른 인격에 대한 존중과 참 사랑이 있는가라고 자문해야 합니다.

1.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강요하고 그것이 참된 삶의 가치라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하시는지에 대한 가슴 뻐근한 감동이 스스로에게 있는지부터 살펴야 합니다. 혹시 나 또한 파블로프의 개처럼 오래된 조건 반사속에서 나온 신앙은 아니었는지 물어보자는 겁니다.

2.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감동이 나 자신을 깊게 적시는 것은 물론 내 가정에서 자녀들에게도 그것이 사랑으로서, 존중으로서 깊은 감동으로 나타나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사람들은 묻습니다. 그때 성경은 말씀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느니라”(요1서 4:12)고 말씀합니다.

이 깊은 사랑,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희생하신 헌신적 사랑에 대한 자각을 가진 존재, 그 존재로서 아내와 남편을 사랑하고 나아가 자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종교적 외형은 그야말로 상대에 대한 폭력과 강압일 뿐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폭력과 강압은 잠깐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진심어린 변화를 절대로 가져올 수 없습니다. 레미제라블이란 책을 통해 우리는 장발장을 변화시킨 것은 참 용서와 사랑을 베푼 신부였지 자베르 경감이 아님을 확인합니다.

다섯째, 우리도 그들과 같이 극한적으로 악해질 수 있는 나약한 인간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겸허함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결혼을 하고 자녀를 키우면서, 저는 마음 속으로 수없이 살인했음을 고백합니다. 살인이 달리 살인이 아니잖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마음으로 미워하면 살인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음으로 때로, 아내와 자녀와 함께 있다는 것, 오래 동안 함께 있으면서 올라오는 스트레스로 때론 갈등이 스쳐 지나갈 때 미움을 품고, 분노하며 종종 하지 말아야할 생각을 품었던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 죄를 외적으로 쉽게 나타내지 않았을 뿐 심적으로는 저 또한 죄인이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래서 마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늘 닦아내지 않으면, 그리고 순간 순간 올라오는 분노를 조절하지 않으면, 감정을 제어하며 스스로를 억누르고 그것을 건강하게 해소하지 않으면, 언제든 저 또한 활화산처럼 폭발할 수 있는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무릎 꿇지 않으면 저 사사시대에 한 사람의 첩을 욕보인 불량배들의 죄악, 그리고 그 죄악을 보고는 자신의 첩의 시체를 12조각으로 쪼개서 이스라엘에 보내며 봉기를 일으켰던 참혹한 비양심적 실상들을 저지르는 죄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 정인이 양부모만이 아니라 나 또한 그런 죄악에 이를 수도 있는 죄악된 본성을 가진 자라는 점을 직시하며 오늘 참회합니다.

여섯째, 소자에게 한 것이 곧 하나님께 한 것이라는 예수 님의 황금률을 다시 한 번 새기고 내 자녀와 내 아내와 남편에게 오늘도 냉수 한그릇, 오리를 가려 한다면 십리를, 그 가치부터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존중은 가장 작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오래 있었다고, 늘 함께 있다고, 우리는 가까운 사람에 대해 무정하고 예의없이 대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습니다. 내 곁에 있는 아내와 남편이, 그리고 내 자녀가 귀한 손님으로 이 자리에 내려와 있다는 걸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알퐁스 도데는 ‘별’이라는 소설에서 목동의 어깨에 기대어 잠든 스테파네트 아가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이따금 나는 그 별들 중 가장 섬세하고 가장 찬란한 별이 제 길을 잃고 내려와 내 어깨에 기대어 잠자고 있다고 상상했다.” 지금 아내와 남편과 자녀는 표현하자면 그런 별입니다. 그 소중한 존재들에 대한 존중,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와 그리스도와 성령님을 대하듯 내 옆의 존재들을 섬기고 사랑하고 존중하는 것이 가장 귀한 신앙의 첫걸음입니다. 그것이 교회에 나가서 드리는 예배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갈등과 균열과 출혈로 점철된 심령과 가정을 유지하다가 예배드리러 간다면, 나를 가장 잘 아는 자녀들에게 그 예배 행위는 가증한 위선으로 비칠 뿐입니다.

마지막으로, 목회자라는, 목회자 부인은 어떠해야 한다는 굴레보다 사랑과 포용의 관점으로 목사·사모, 그 가족들을 대해야 합니다. 목회자 스스로도 목사는 이러해야 한다는 어떤 형식적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돼야 합니다. 사랑과 관심만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자녀를 변화시킵니다. 지나친 강요는 반항심과 거부감을 키우고 반대로 무관심과 방종은 자녀의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그 균형은 누구도 맞추기 어렵습니다. 그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녀에게 한계있는 인간임을 미안하게 생각하며 균형을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목사 부인이라고, 목사 자녀라고 참된 사랑과 존중의 대상이기 보다 신앙적 규제와 틀 안에 가두고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한다’는 관념 을 내세우는 것은 그들의 인생에 대한 폭력이 될 수도 있습니다. 

2015년의 일입니다. UFC파이터, 론다 로우지란 여성 파이터를 홀리홈이란 선수가 이기면서 목사의 딸 얘기가 급부상하게 됐습니다. 먼저 론다 로우지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녀는 2008년 제29회 베이징 올림픽 유도 여자 70kg급 동메달리스트입니다. UFC라는 미국 최고의 메이저 격투 단체에서 2012년 밴텀급 챔피언에 올라 홀리홈이란 파이터에게 패하기 전까지 12승 무패의 장기집권을 한 무패의 파이터였습니다. 누구도 대항하지 못할 듯했습니다. 심지어 49전 49승 무패의 복서, 메이웨더와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강력한 임팩트를 보여준 여자 선수였습니다.

그런 그녀를 UFC에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홀리홈이 1라운드 초반부터 압박하기 시작했고 결국 헤드킥으로 넉다운시키며 승리하자 그녀가 목사의 딸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더 화제가 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녀에게 ‘프리쳐스 도우터’(preacher’s daughter)라는 별명을 붙여줬습니다. 설교자의 딸이란 거죠. 그리곤 그녀의 인성에 주목하기 시작했습니다. 목사 딸이라더니, 겸손하다, 눈물이 많다, 코치 역할(목사인 아빠가 격투기 선수인 딸의 코치 역할도 해줬다고 한다)을 한 아빠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눈물을 흘렸다 등등. 그녀는 경기에서도, 인성에서도 승리했다고 극찬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만일 홀리홈이 미국이 아닌 한국에서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요? 그녀의 인생은 달라져도 한참을 달라졌으리라 봅니다. 목사의 딸이라는 이유로 온갖 규범이 그녀에게 굴레로 씌워졌을 게 뻔합니다. ‘목사 딸이니 넌 이래야 한다’는 굴레는 가족뿐 아니라 주변에서 더욱 심하게 강요했을 것입니다. 성도들의 시각도 만만치 않았을 것이고. 격투기를 한다고 하면 “목사 딸이 그걸 해서야 되겠니?”라며 선비질했을 게 뻔합니다. 목사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들과 동일하게 봐 주십시오. 게임을 하고 싶고, BTS를 좋아해야 할 나이이고, 만화도 보고 싶고 놀고 싶어할 때입니다. 유교적 틀에서 목사를 조선시대의 선비처럼 규율화하고 자녀들에게까지 그 틀안에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목회자도 사람입니다. 직분이 다를 뿐 동일한 성도이고 인간입니다. 그도 하나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할 때 타락하고 변질될 수 있는 본성적으로 죄악된 인간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견제할 장치가 없을 때,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악행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또한 사람이기 때문에 목양을 하며 돈을 받아야 하고, 돈을 받아서 생활해야 하고, 생활하면서 먹고 마셔야 합니다. 그 일상적 삶을 인간으로서 동일하게 유지해야 하는 생활인입니다. 그리고 목회자는 그 어른인 남편이 선택한 길이지 자녀도 목회자는 아닙니다. 아내도 목회자는 아닙니다. 그 규율과 굴레를 가족에게까지 씌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유롭게 놓아 주십시오. 아니 지나친 관심과 백안시하는 눈길을 멈추고 하나님이 주신 기본적인 사랑과 존중과 관심 정도로만 나타내 보여 주십시오.

저는 오늘 아침 서울남부지방법원에 정인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두 양부모를 엄벌에 처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조금 늦게 알게 돼서, 오늘에서야 보냈습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뭐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막막합니다. 그러나 할 수 있는 최소의 범위에서, 가장 작은 일부터 시작하는 게 맞겠다 싶었습니다. 상대의 정황이나, 고려할 인정, 사정 등은 정인이의 죽음 앞에서 철저히 배제했습니다. 엄정한 법 집행부터 당부했습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절망도 있지만 절망의 아픔을 생산의 에너지로 바꿔야 하는 것은 살아남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러나 무엇부터 해야 할지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잘 모르겠는 게, 더 가슴을 무겁고 답답하게 합니다. 진정서는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첫걸음일 뿐이었습니다. 차마 미안하다는 말도 못하겠습니다. 그래도 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정인아 미안하다. 이제 알아서 미안하다. 아무것도 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용서해 다오.

그리고 어디선가 가슴을 찢으며 땅을 치고 아파하고 있을 이름 모를 정인이의 친모, 그분께도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사죄드립니다.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프고 슬픈 일을 당하셨지만 나타날 수도 나타나서도 안될 수밖에 없는 상황일 거라 생각됩니다. 가슴에 묻고 가야 할 이 아픔은 당신 잘못으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저 또한 목사로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사람의 가정에서 참혹한 일이 발생한 점에 대해 대신 사죄드립니다. 죄송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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