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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계보 6] 친림·강신극의 원조 유명화(활동연대 1927년~193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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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계보 6] 친림·강신극의 원조 유명화(활동연대 1927년~1933년)
  • 정윤석
  • 승인 2018.12.12 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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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영적 권위를 예수와 동일시···'새생명의 길 시대' 백남주 등에 직접 영향

네이버나 다음 포털 사이트에 검색어를 치면 자동으로 따라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연관 검색어라고도 하죠. 만일 오늘날 유명화가 살아 있었다면 그녀의 연관 검색어에는 뭐가 붙었을까요? ‘강신극’, ‘친림’이 따라 붙었을 거예요. 강신극은 마치 신이 자신에게 친히 임해서 어떤 말을 대신 전해준다는 것이고 친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사람에게 임해서 친히 말씀하신다는 의미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1920년~1930년대에 강신극(降神劇), 친림(親臨) 현상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것이 무당의 접신과 다를 바가 없는 개념으로 보였을 겁니다.

유명화는 원산의 한 감리교회 여신도였다가 1927년경 소위 입신(入神, 인간이 부지불식간에 영혼이 몸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바울의 체험처럼 천국과 지옥 등을 경험하고 다닌다는 신비체험의 일종)을 한 후부터 예언과 방언을 시작했다 전해집니다. 유명화의 특징은 예수님이 자기 안에 친림하여 계시를 주신다고 하면서 자신의 영적 권위를 예수와 동일시한 거였습니다. 이 권위 앞에 당시 유명했던 목회자들이 짚단 쓰러지듯 푹푹 쓰러지거나 미혹되거나 영향을 받은 건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당시 부흥사로 유명했던 이용도 목사를 향해 호통을 쳤던 일화는 유명합니다.
“이때 유명화는 예수 가라사대로 시작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 ‘용도야, 너는 내 교회를 세워라, 이놈, 네가 교회를 분립치 않으면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자 이용도 목사가 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굴복했다고 한다.”(탁명환, 기독교이단연구, 국종출판사, 1998년 33판, 99쪽). 이런 유명화에 가세하게 된 이가 당시 함남 노회 전도사로 있다가 후에 원산 장로교회의 목사가 된 한준명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백남주처럼 언어 천재로 불리던 사람입니다. 1932년 1월 28일, 한준명 목사는 여신도인 이유신과 함께 유명화를 데리고 평양에 가서 30일간 입신 강신극을 연출하여 물의를 빚었습니다(위의 책 참고).

또 한 명, 당시 평양신학교에서 정통신학을 한 백남주가 유명화의 영향을 받습니다.

“유명화는 이때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의 아들들이 성자(聖者)로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여는 시대가 오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였다. 또한 백남주와 한준명이 스베덴보리(Swedenberg)의 저서를 읽고 여러 해를 기도하던 중 신(神)이 유명화에게 친히 임(臨)하여 대언하기를 ‘백남주와 한준명 그리고 박승걸이 1933년에 새 교회를 세울 것을 명(命)하셨다”고 한다.’ 유명화의 예언에 따라 백남주와 한준명이 먼저 나서서 기성교회와는 구별되는 새 교회를 창립하자는 움직임을 일으켰다.”(임웅기,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한국 개신교계 신종교의 윤리성에 대한 비판적 접근- 신천지증거장막성전을 중심으로).

CBS 변상욱의 싸이판에서 그린 이단 계보도
CBS 변상욱의 싸이판에서 그린 이단 계보도

유명화의 강신극이나 친림은 당시 유명한 일부 개신교 목회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원산에서 시작한 유명화의 강신극은 새생명의 길 시대라며 삼시대론을 주장한 백남주와 한준명에 의해 1932년부터 평양으로 그 신앙적 특성이 암세포 퍼지듯 전이됩니다. 원주의 한 지역에서 어쩌면 소리소문없이 사장됐을 수도 있는 유명화의 친림사건은 오히려 당시 정통신학을 한 일부 유명 목회자의 지지속에 날개를 단 셈입니다.

이호빈(현 강남대학교의 전신 중앙신학원 설립자)도 유명화에 대해 “주께서 스웨덴보르에게나 선다싱에게는 간접 나타나셨지만 유명화에게는 직접 친림했습니다. 주께서 우리 조선에 이렇게 친림하시니 이는 조선 지대의 영광이외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민경배, 신개정판 한국기독교회사,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년, 442쪽).

강신극·친림의 원조를 캐고 캐서 올라가면 누구에게 닿아 있을까요? 기원후 150년경 페푸자(현 터키의 한 지역)라는 촌락에 천년왕국이 임한다는 몬타너스로 이어지게 됩니다. 몬타너스는 큐렐이라는 여신의 사제 출신이었습니다. 이교 출신자였던 만큼 ‘황홀경’, 신접하는 습성을 그리스도인이 된 후에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는 황홀경, 즉 영적 체험을 추구했고 그러다 직접 받은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이었습니다. 브리스길라와 맥시밀라는 몬타너스와 함께 하며 영매 역할을 하는 여성이었다고 합니다(J.W.C완드 지음/ 이정석 번역, <교회사>, 1960, 81p 참고). 

문 - 하나님이 친히 임했다는 유명화의 ‘친림’과 성도들에게 있는 성령의 내주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건가요?

먼저 친림에 대한 개념부터 정확히 할 필요가 있겠어요. ‘유명화 친림’의 특징은 하나님께서 직접 자신의 안으로 들어오셨다는 주장이라고 할 수 있겠죠? 중요한 점은 그걸 인격적 혼동으로 해석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곧 주님이고, 주님이 곧 나라는. 이런 존재가 많아지면 안되기 때문에 친림을 받는 사람도 아주 특수한 ‘한 사람’에게만 단독적으로 유일하게 임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친림받았다는 사람은 유일하거나 아주 특수하기 때문에 주로 그 사람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친림받지 못한 상대에게 어떤 지시와 명령을 내립니다. 말을 할 때 인간이 말하는 게 아니라 마치 하나님이 말하는 것처럼 흉내내는 것도 특징 중 하나입니다.

루이스벌코프는 이런 위험성을 지적했습니다. 한 인격과 다른 인격이 ‘합일’되어 그리스도와 신자가 더 이상 구분된 인격으로 존재하지 않게 된다고 비판한 겁니다. “어떤 극단주의자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이며,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나는 무죄한 고난을 받아 너를 구속했다’라고 서슴없이 말하기까지 했다.”(루이스벌코프, 권수경·이상원 옮김, 조직신학,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3년 7판, 699쪽). 자신을 하나님화해 성도들에게 폭군처럼 대하는 교주들에게서 보이는 현상이 바로 친림입니다.

반면 성령의 내주는 이와 전혀 다릅니다. 절친한 친구나 연인 관계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친구가 내 마음에 들어와도,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가슴이 떨리는 사랑을 나누는 연인관계에 있어도 둘의 관계는 인격적이기 때문에 인격적 혼동이나 혼란이 생기지 않습니다. 즉, 내 연인(친구)가 내가 되고, 내가 곧 연인(친구)가 되는 인격적 혼동은 생기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령의 내주가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내주는 성부 하나님께서 친히 내 안에 들어오셨다는 개념이 아니라 성령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 안에 신비하게 연합했다는 개념입니다. 친림은 신의 인격이 나의 인격화됐다고 주장하는 반면, 성령의 내주는 주님께 속한 모든 사람들안에 성령 하나님이 거하시고, 하나님께서 자신의 모든 가족에게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주신다는 개념입니다. 내주하시는 성령께서는 우리가 산에 가서 기도를 많이 하거나, 선행을 하거나, 공덕을 쌓은 것을 보시고 찾아오시는 분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자에게 구원을 얻었다는 증표로서 보내주시는 인격적인 분입니다(로버트 라이트너, 박용성역, 복음주의신학개론, 기독교문서선교회, 1994년 재판, 159쪽).

제임스 패커는 성령의 임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습니다. 첫째, 예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눈다, 둘째, 예수님을 닮아 인격이 변화하기 시작한다, 셋째 부분이 인상적입니다. “셋째, 성령은 그리스도의 사랑하심과 구속하심으로 우리가 성부 하나님의 가족으로 입양되어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더불어 공동상속자’(롬 8:17)가 된다는 확신을 우리에게 주신다. 이러한 확신으로 믿는 자의 가슴에는 감사와 기쁨, 소망, 그리고 더 큰 확신, 요컨대 자신감이 넘치게 된다. ··· 새뮤얼 테리언은 이러한 임재를 ‘붙잡을 수도, 만질 수도 예측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고, 실증적 검증이 불가능하며, 겉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안으로는 저항할 수 없다’라고 묘사한다.”(제임스 패커, 성령을 아는 지식, 홍성사, 2002년, 66~67쪽).

친림과 내주는 이토록 큰 차이가 있습니다. 친림이 자신을 신격화하는 사이비들이 상대를 장악하고 압도하기 위해 주장하는 폭력적이고 매우 강압적인 것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내주는 인격적인 것으로, 실증적 검증은 불가능한, 구원과 관련한 확신, 감사와 기쁨 등 성도들의 성화적 삶으로 나타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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