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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은 왜 1914년을 예수 재림의 때로 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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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증인은 왜 1914년을 예수 재림의 때로 봤나?
  • 정윤석 기자
  • 승인 2020.10.11 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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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후의 날과 재림의 시기 계산법(여호와의 증인편)

‘여호와의 증인’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십니까? 뙤약볕이 내려쬐는 거리에서 파수대를 홍보하는 사람들, 병역기피, 수혈거부, 생일기념거부 등등 많을 겁니다. 저는 오늘 여호와의 증인의 사기 시한부 종말론에 대해 설명 드리고자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1914년 10월 초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신다고 시한부종말 사기 사건을 일으켰던 단체입니다. 도대체 그들은 왜 예수 재림의 때를 1914년이라고 했을까요?

1. 재림의 연대 계산

1-1. 요리를 하려면 재료가 필요합니다. 재림을 주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재료가 있어야합니다. 단골 재료로 사용되는 게 다니엘서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많은 묵시적 표현이 다니엘서에서 왔는데, 재료가 아무리 신선하고 좋은 들 뭐하겠습니까. 아무리 성경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말씀인들 뭐합니까. 악한 요리사가 그걸 갖고 독이든 요리를 할 수 있습니다. 윌리엄 밀러가 다니엘서 8장을 갖고 사기를 친 것과 달리 찰스 테이즈 러셀은 다니엘 4장의 느부갓네살 왕의 꿈에 예언된 일곱 때를 갖고 날짜를 조합해 냅니다.

1-2-1. 다니엘서 4장 16절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느부갓네살이 짐승의 마음을 받아 폐위되어 일곱 때를 지나게 되리라는 말씀을 근거로 합니다.

1-2-2. 이 일곱 때는 한때, 두때, 반때 1260일의 곱절, 즉 7년이지요. 이것을 날 수로 계산하면 2520일이고, 여기에 윌리엄 밀러처럼 연일 계산법을 적용하면 2520년입니다. 아주 쉽죠잉.

1-3. 기점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시드기야 통치 제 9년 열째달 10일 바베론의 느부갓네살 왕의 이스라엘 침공연도, 즉 기원전 607년을 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로 상징되는 예루살렘이 침공을 받은 기원전 607년 이후 2520년이 지난 뒤인 1914년을 러셀은 세상 나라의 통치가 끝나고 하나님의 통치가 시작되는 재림의 때로 계산한 겁니다.

1-4. 그날 예수께서 재림하셨습니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러셀은 이를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재림해 하늘에서 통치를 시작한 해라고 주장합니다. 이걸 믿는 게 여호와의 증인들입니다.

2. 재림 연대계산 무엇이 문제인가?

2-1. 연대계산 시도의 문제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할 재림의 연대 계산을 했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재림의 때를 산출하는 건 사이비, 사기꾼들이 하는 짓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둑 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둠에 속하지 아니하나니”(살전 5장 4~5절).

주님께서 우리에게는 도둑같이 임하지 못하신다는 말씀은 그날과 그때를 우리가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그분의 자녀, 아들’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주님이 도둑으로 오시는 게 아니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2. 연대계산 방법의 문제

2-2-1. 연일 계산법이 문제입니다.

1) 느부갓네살의 일곱 때가 2520년이라면, 계시록 12:6의 천이백육십일도 1260년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여자가 광야에서 양육받는 기간도 1260년이 돼야 하죠.

2) 연일계산법이 맞다면 출애굽기의 바로왕의 풍년 칠년과 흉년 칠년은 5040년이었어야 합니다.

2-3. 일곱 때를 재림의 기간으로 해석한 게 문제입니다.

1) 다니엘 4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언제인지를 예언한 말씀이 아닙니다. 당시 거대제국으로 성장한 바벨론을 세운 느부갓네살이 온 세상을 다스리는 왕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 뒤에 영원한 왕국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이 참된 지배자임을 설명하는 말씀입니다.

2) 단 4:25의 일곱 때는 재림의 때가 아니라 왕이 쫓겨나 들짐승처럼 지내는 기간을 의미합니다. 이 때를 예언하니 “공의를 행하고, 죄를 끊고 가난한 자들을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끊으십시오”(27)라는 게 다니엘의 예언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3) 그런데 예수 재림과 아무 상관없는 본문에서 일곱 때를 2520년이라는 수천년의 기간을 뽑아내는 건, 화투놀이에서 밑장빼기 같이 사람들을 우롱하고 속이는 성경해석입니다.

2-4. 실패 후 합리화의 문제

2-4-1. 사람이 실수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수학문제를 풀 때 어떻게 합니까. 답이 틀리면 수식을 점검합니다. 그래서 오류가 있으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2-4-2. 그런데 여호와의 증인은 1914년부터 예수께서 하느님의 왕국의 왕으로 통치하기 시작하셨다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이후에 이미 통치권자로 올리셨음을 말씀합니다. 1914년이 아닙니다.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 2:8~11).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하신 후 십자가에 죽으시자 하나님은 이미 그분을 모든 이들의 통치권자로 세우십니다. 이것이야 말로 영적인 통치이지 세속 나라의 권세자가 되는 게 아닙니다.

3. 당시 시대상황은 어땠나?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된 해가 1914년입니다. 러셀은 10월에 예수 재림을 예언했는데, 1914년 7월 28일 세계대전이 발발했으니 정말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종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세계대전은 1918년 11월 11일 마무리됐고 지금까지 러셀의 예언은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재림을 예언한 러셀은 1916년 10월의 마지막 날, 사망합니다.

결론: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요?

계속 말씀드리지만 기근, 전쟁, 지진 등은 예수님 시대 이후에 중단된 적이 단 한번도 없습니다. 매스컴이 발달한 현대에는 그런 재난이 더 많아지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지요. 그런 소식을 들을 때 사람들은 혹시나 이 때가 그때가 아닌가라는 두려운 마음으로 시대를 바라봅니다. 그럴 때 시기를 딱딱 대입해서 연대계산을 하는 것은 엄청난 매력이 있어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는 결국 사기사건으로 끝난 것을 보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는 이 사회에서 진정으로 종말과 재림을 기다리고 열망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오히려 사기 사건을 일으키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키며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즉 하나님의 특정한 ‘카이로스’의 날짜가 그분에게 속해 있음에도 그것을 인간의 시간인 크로노스로 꿰어 맞추려고 시도합니다. 그게 십계명의 제 3계명까지 어기는 무서운 죄라는 걸 아십니까?

재림이 가까운 때 정말로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이라면 어떠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고후 15:58). 주의 일에 힘쓰는 성도들이 돼야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주의 일입니까?

“또 약속하신 이는 미쁘시니 우리가 믿는 도리의 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브리서 10장 23~25). 믿음, 소망, 사랑으로 격려하며 모임에 힘쓰며 살아야 합니다.
 

스피노자가 한말로 알려진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실제로는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비문에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닌다는 교인들이 ‘재림’이란 글자만 나오면 그리스도인이 갖추고 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와 본분을 망각하고 사회 혼란을 부추기고 흑세무민하는 사이비세력으로 변모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 올수록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비문에 쓴 것처럼 우리는 우리가 해야 할 본분을 하나님 앞에서 다 해나가야 합니다. 오늘 내가 심어야 할 ‘사과나무’는 과연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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